[기억할 오늘] 11.22
마거릿 대처(Margaret H. Thatcher, 1925~2013)가 1990년 11월 22일 총리직 사퇴를 선언했다. 보수당 당수를 뽑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획득에 실패한 뒤 당 중진들의 권고로 2차 투표를 포기한 직후였다. 1979년 5월 취임한 이래 일주일 뒤 공식 퇴임하기까지 11년 209일의 최장 총리를 지낸, 15년 당수의 끝이 그러했다. 그는 1940년 이래 반세기 영국사에서 “총선 패배나 건강상의 이유와 무관하게 (사실상)강제로 퇴진 당한 유일한 수상”이기도 했다.(‘영국 노동당사’ 고세훈)
정치인 대처의 말년은 험했다. 경제는 다시 심각한 불황으로 치달았다. 인플레, 실업률, 국민총생산 등 지표가 추락했고, 빈부격차와 의료ㆍ복지 후퇴 등으로 민심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대처리즘’의 총체적 실패였다.
대처는 흔히 영국병이라 불리는 70년대의 저성장ㆍ고복지를 극복하고, 노동당의 사민적 합의와는 또 다른 보수당 특유의 온정주의적 복지정책의 틀을 깨고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경제 부흥을 이루고자 했다. 정부 퇴각과 시장의 전진. 그의 방식과 속도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조세 감축과 공공지출 삭감, 국영기업 민영화와 탈규제. 예컨대 그는 재임 중 소득세 최고율을 83%에서 40%로 43%나 낮췄는데, 같은 기간 OECD 평균(68%→50%)은 18% 감소했다. 반면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는 두 배로 높였고, 국민보험료도 대폭 상향 조정했다. 대처리즘의 재정 공백을 메워준 건 북해 유전과 국유자산 매각 자금이었지만, 그건 화수분이 아니었다.
정부 역할의 축소는 통화정책(통화량과 이자율정책) 의존도를 높였고, 대처는 유럽의 정치ㆍ금융 통합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고집스런 통화주의는 인플레와 실업률을 잡지 못했다. 그의 고집이 영국의 고립이 심화할 것이라는 위기의식 속에 그의 핵심 각료들조차 하나 둘 곁을 떠나갔고, 그 끝이 퇴진 요구였다.
근년의 브렉시트와 테리사 메이의 총리 취임으로 대처의 반EU 노선이 새롭게 주목 받는 모양이다. 대처리즘에 가장 반발했던 영국 노동계급이 브렉시트를 지지한 주력층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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