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가정 깬 강간살인범
혈액형-사진 얻고도 놓쳐 한으로
올해 6월 재수사해 8000명 압축
비슷한 얼굴 찾아내 DNA검사
“늦게나마 원한 풀어드려 다행”

18년 전인 1998년 10월,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 “집을 보러 왔다”며 한 남성이 찾아왔다. 집주인 A씨(당시 34세ㆍ여)씨는 생활정보지에 전세 광고를 냈던 터라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줬다. 그러나 집 안으로 들이닥친 남성은 돌변해 A씨의 양팔을 결박하고 성폭행한 다음 목을 졸라 살해했다. 얼마 후 집으로 돌아온 열한 살 딸은 죽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제 손으로 옆집에 도움을 청했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도봉경찰서는 별도 팀을 꾸려 수사에 들어갔다. 초기 수사는 순조로웠다. 범인의 유전자정보(DNA)를 채취해 혈액형을 확인했고, 그가 A씨 신용카드를 빼앗아 현금인출기에서 151만원을 인출한 사실을 추적해 확인해 폐쇄회로(CC)TV 사진도 확보했다. 공개수배도 했다. 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범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사건은 그렇게 미제로 남는 듯했다.
당시 막내 형사로 수사에 투입됐던 김응희 경위(현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에게 이 사건은 마음의 빚이었다. 엄마를 잃고 두려움에 떨던 A씨 딸과 아들(당시 10세)의 눈빛은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고민하던 김 경위는 결국 올해 6월 재수사에 착수했다. 강간살인의 공소시효는 15년. 원래는 이미 3년 전 수사 권한이 사라져야 했지만 2010년 법 개정으로 DNA 등 명확한 증거가 있으면 공소시효를 10년 연장할 수 있게 된 점이 김 경위를 도왔다.
경찰은 범행 당시 범인 연령대를 20대로 추정하고 1965~75년 출생한 유사수법 전과자 8,000여명 중 범인과 같은 혈액형을 가진 125명을 수사대상자로 압축했다. 이후 대상자들과 범인 사진을 일일이 대조하던 중 비슷한 얼굴을 가진 오모(44)씨를 특정했다. 경찰은 곧 경기 양주시 오씨 주거지 인근에서 그가 피웠던 담배꽁초를 찾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DNA 검사를 의뢰했다. 결과는 ‘일치’ 였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잠복 수사 끝에 18일 오씨를 붙잡아 강간살인 혐의로 구속했다. 범죄 발생 18년 22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씨는 경찰 조사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며 범행을 인정했다. 김 경위는 “검거 소식을 들은 피해자 남편은 ‘아내가 먼저 간 후 고생이 많았는데 정말 고맙다’고 했다”며 “뒤늦게라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원한을 풀어드릴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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