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겹치면 필연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의 해외 투자 1순위로 부상한 베트남에서도 대기업들과 얽힌 우연 같은 이야기가 떠돌았습니다. 수도 하노이에 초고층 빌딩 같은 대규모 투자를 한 뒤 줄줄이 ‘고난의 길’이 시작됐다는 내용입니다.
소위 흑역사의 시작은 ‘세계경영’으로 전성기를 달렸던 1990년대 대우그룹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대우그룹은 96년 10월 하노이 신시가지인 바딘지역에 18층 규모의 ‘하노이 대우호텔’을 열었습니다. 이 호텔은 대우건설과 현지 기업이 합작해 만든 대하비즈니스센터 안에 자리잡았습니다.
대우호텔은 당시 10층 이상 빌딩이 없던 하노이의 최고층 건물이자, 최초의 5성 호텔이었죠. 대규모 연회장과 스포츠센터도 갖췄습니다. 지금 내놓아도 어느 특급호텔 못지 않게 화려합니다. 과거 신문기사를 보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개장식에 직접 참석할 정도로 공을 들였습니다.
삼성그룹과 재계 2위를 다툴 정도로 잘 나갔던 대우그룹은 99년 해체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대하비즈니스센터와 대우호텔은 하노이에서 여전히 건재합니다. 대하비즈니스센터에는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 아시아나항공 지점 등 국내 기업 및 관련 기관들이 입주해있습니다. 대우호텔은 아직도 우리 관광객이 선호하는 호텔 중 하나고요. 김 전 회장도 2012년부터 자신이 개척한 베트남 하노이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 하노이의 최고층 빌딩은 이름처럼 72층인 ‘랜드마크72’입니다. 최고 346m의 타워동과 50층짜리 주거동 2개로 이뤄졌습니다. 2007년 착공해 2011년 완공됐습니다.
랜드마크72의 건축 연면적은 두바이의 세계 최고층 빌딩 ‘부르즈 칼리파’(47만여㎡)보다도 넓은 60만㎡에 이릅니다.
국내에서 랜드마크72는 경남기업을 유동성 위기로 내몬 건물로도 유명합니다. 총 사업비가 10억5,000만 달러(약 1조2,000억원)나 들었습니다. 토지 매입부터 시공까지 국내 자본과 기술로 건설했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린 임대 실적 부진으로 경남기업의 돈줄을 졸랐습니다.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서도 적자가 누적된 경남기업은 지난해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그로부터 이틀 뒤 자원개발 비리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정치권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73년 국내 건설사 중 1호로 상장된 경남기업은 42년 만에 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아직도 랜드마크72는 베트남을 넘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국 식당들이 많이 입주했고, 한국기업 주재원 자녀들을 겨냥한 학원들에게도 인기입니다. 연예인들 중에서도 랜드마크72에 집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경남기업이 채권단에 넘긴 랜드마크72는 글로벌 구조조정전문기업 AON BGN에 매각됐습니다. 지난 4월 미래에셋증권도 이 거래에 4,000억원을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셋증권이 이중 공모로 판매해야 하는 자산유동화증권(ABS) 3,000억원 어치를 사모로 판매한 사실이 올해 국정감사에서 드러나며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하노이의 신흥주거지역인 북안카잉의 264만㎡ 부지에는 ‘스플랜도라’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포스코건설이 추진하는 대규모 신도시 사업이죠. 5단계에 걸쳐 주택 6,196가구와 호텔, 국제학교, 종합병원, 호수공원, 하수처리장 등 사회기반시설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아파트 496가구와 단독주택 등 총 1,049가구를 짓는 1단계 사업은 2013년 준공됐습니다.
거대한 자립형 신도시로 향해 가고 있는 스플랜도라에도 지난해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포스코건설 베트남법인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고, 법인장이었던 박모 전 상무가 구속 기소됐습니다. 박 전 상무는 “해외 사업장에서는 관행이고, 회사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포스코건설은 올해 상반기 영업손실 1,771억원을 기록했습니다. 반기 순손실은 2,145억원입니다. 5년 만의 적자전환입니다. 무리한 해외사업이 실적에 영향을 미쳤고, 그 중에는 베트남 사업의 손실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노이 대우호텔 건너편에는 롯데자산개발이 해외에 처음 세운 초고층 복합빌딩 ‘롯데센터 하노이’가 우뚝 서 있습니다. 부지 1만4,000여㎡에 지하 5층 지상 65층 규모입니다. 이곳에 롯데호텔과 백화점, 롯데마트, 사무실, 레지던스 하우스, 롯데시네마 등이 집결했습니다. 2009년 첫 삽을 뜬 뒤 5년 만인 2014년 완공된 이 빌딩은 하노이의 또 다른 랜드마크로 자리잡았습니다.
롯데센터 하노이의 외형에는 베트남 여성들의 전통의상 ‘아오자이’ 옷자락이 형상화됐습니다.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외자유치에 대한 외국계 기업의 화답으로 이해됩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하노이 방문 시 머문 JW 메리어트 호텔은 하늘에서 보면 용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옛 지명이 탕롱(昇龍)인 하노이에서 용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롯데센터 하노이를 짓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아 부은 롯데에도 지난해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신동주ㆍ동빈 형제의 경영권 분쟁으로 롯데 총수 일가의 민낯이 드러났고, 검찰의 전방위 수사가 이어졌죠. 베트남 등 해외 사업장에서의 비자금 조성 의혹도 제기됐지만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과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경남기업, 포스코, 롯데 등의 베트남 사업을 둘러싼 비자금 논란이 계속 나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하긴 베트남이 아니더라도 신흥국 투자 과정에서는 비자금 의혹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습니다. 혹자는 “아직까지 투명하지 않은 외국에서 대규모 사업을 하려면 뒷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뒷돈’이 ‘뒤탈’이 된 선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최근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대기업들만 봐도 정도를 벗어난 경영이 언젠가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노이=글ㆍ사진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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