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벽에 평화 상징 꽃무늬 스티커
학생들이 경찰ㆍ시위대 완충 역할
서울역 보수단체 맞불집회에도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다독여
노동단체 등 조직 동원 없이
가족ㆍ연인 등 참가자 더 다양해져
19일 오후 8시20분 서울 경복궁역 사거리(내자동로터리). 4차 촛불집회 행진 종착지인 이곳에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6만5,000여명의 시민이 모여 들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청와대를 목전에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들으라며 ‘하야하라’는 구호를 목이 닳도록 외쳤다. 간절한 외침은 경찰 차벽에 가로막혔지만 오후 11시50분 자체 해산할 때까지 충돌을 의심케 할 만한 어떤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찰 연행자 0명. 19일 95만명(경찰 추산 24만명) 시민이 만든 평화집회의 성과이자 박 대통령 퇴진을 바라는 강력한 염원의 반증이었다. 차벽에 기어오르고 경찰 방패를 빼앗는 등 일부 참가자의 폭력행위로 23명이 연행됐던 3차 촛불집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차벽 앞에 설치된 자유발언대에 선 정재용(20)씨는 “정권 퇴진 염원은 간절하지만 같은 국민으로서 경찰 인권도 지켜주면서 민주주의를 수호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화문 촛불집회가 자리잡으면서 평화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참가자들의 시민의식은 갈수록 빛을 발하고 있다. 이날 행진에서는 평화를 상징하는 ‘꽃무늬 스티커’가 등장했다. 예술크라우드펀딩 ‘세븐픽처스’가 경복궁역에서 무료로 나눠준 것으로 장미꽃, 나팔꽃 등이 새겨져 있다. 시민들은 스티커 3만여개를 차벽에 빼곡히 붙이면서 공권력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대입 수험생 이민수(17)군은 “과외 선생님을 따라 행진 선두에 서 조금 걱정이 됐는데 분노하는 마음이 중요할 뿐, 작은 스티커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우리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단체의 맞불집회에도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촛불집회가 열리던 시각, 서울역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박근혜를사랑하는모임(박사모) 등 보수단체 회원 1만1,000명(주최 측 추산 3만명)이 숭례문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한때 물리적 충돌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 “질서 있게 행동하자”는 말로 서로를 안심시킨 덕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이날 저녁 문화제에서 애국가를 부른 가수 전인권은 “혹시 박사모가 한대 때리면 그냥 맞고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쪽을 택하자. 세계가 지켜보고 있는 만큼 가장 폼나는 집회를 만들어 보자”며 참가자들을 다독였다. 직장인 유정미(26)씨는 “박사모의 행진 소식이 전해지자 광화문광장에 앉아 세월호 강연회를 듣는 사람들이 잠시 들썩이기도 했지만 이내 강연자에게 집중했다. 신뢰로 뭉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주말 집회보다 규모는 작았으나 노동조합 등의 조직적 인력 동원이 없었던 탓에 청소년과 가족, 연인 등 참가자 면면은 훨씬 다양해졌다. 특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수험생, 교복을 입은 여고생, 이제 막 초등학생 티를 벗은 중학교 새내기 등 10대 청소년들은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시국집회를 축제로 이끌며 평화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폭력 위험수위가 가장 높았던 내자동로터리 차벽 앞에 진을 치고 경찰과 시위대의 완충 노릇을 한 것도 이들이었다. 대열 맨 앞에 선 중학교 3학년 김익현(15)군은 “무장한 의경들을 처음 봤지만 우리의 형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며 꽃을 전달하려 했다.
오후 11시 집회가 공식 종료되자 시민들은 쓰레기를 대형 봉투에 옮겨 담고, 나무나 차벽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내며 수준 높은 집회문화를 완성했다. 아들, 딸 손을 잡고 쓰레기를 치우던 주부 정미선(44)씨는 “아이들이 먼저 나무와 꽃에 붙은 스티커를 옮기자고 제안해 열심히 청소 중”이라며 웃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전 세대, 계층이 하나의 목표 아래 모이면서 광장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토론의 장이자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며 “박근혜 정권이 받는 압박 강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벽 앞 시위대가 거의 해산할 무렵 한 경찰관이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에게 “수능은 어땠느냐”며 안부를 물었다. 여고생들의 왁자한 답변과 함께 4차 촛불집회는 아무 일 없이 끝났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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