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눈 앞에 나타나~ 네가 자꾸 나타나~.”
19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4차 촛불집회가 열린 서울 광화문광장. 별안간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주제곡이 울려 퍼졌다. 일찌감치 광장을 채운 시민들은 노래 후렴구를 듣자마자 무슨 의미인 줄 알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시크릿가든은 박 대통령이 당선 전 병원에 다닐 때 사용했다는 가명 ‘길라임’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드라마다. 일부 남성 참가자들은 남자 주인공 현빈의 트레이드마크인 ‘반짝이 트레이닝옷’을 입고 노래에 맞춰 포즈를 취했다. 현빈 퍼포먼스를 준비한 정희영(37ㆍ여)씨는 “이달 초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예술인들이 모여 일주일에 한 번씩 유행에 맞춰 반정부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규탄 집회에 참여하는 젊은 세대가 늘면서 시국을 유쾌하게 꼬집는 패러디, 풍자의 강도도 한층 거세지고 있다. 촛불집회는 딱딱하고 단순한 구호 대신 여론의 관심을 높일 수 있는 창작물의 등장으로 ‘즐기는 투쟁’으로 변모 중이다.
짧고 강력하게 구호를 전달하는 손푯말은 전 연령대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날 청소년집회에서 ‘내가 이러려고 공부했나 자괴감이 들어’ 푯말을 든 신주영(15)양은 “대통령의 사과담화 문구를 재해석하는 게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이고 메시지도 잘 전달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기 마련”이라고 한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의 발언도 패러디 표적이 됐다. 김종학(55)씨는 “김 의원의 망언을 규탄하기 위해 ‘촛불은 바람이 불면 옮겨 붙는다’는 정반대 해석의 피켓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사건 관련 주요 인물이나 상황을 묘사한 퍼포먼스는 단연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광장에서 외계인으로 분한 재미동포 차캐니(49)씨는 “우주의 기운 운운한 대통령을 꼬집기 위해 실제 우주에서 온 외계인 의상을 입어 답답함을 잠시나마 덜어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한국은 원플러스원 편의점 국가가 됐다. 대통령을 뽑았더니 한 명(최순실)이 더 딸려 왔다(20대 청년)” “대통령과 정신연령이 같은 18살(고3 학생)” 등 톡톡 튀는 시민들의 자유발언도 청량제 역할을 했다.
이날 집회에서는 ‘단체 패러디족’이 대거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광장으로 속속 모여든 행렬에는 ‘전견련(전국 견주 연합회ㆍ전경련 패러디)’ ‘민주묘총(고양이 키우는 사람들 총회ㆍ민주노총 패러디)’ ‘트잉여운동연합(트위터를 즐겨 하는 사람들 모임)’ 등 이름이 적힌 깃발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대학생 박성하(23)씨는 “지난 주엔 혼자 집회에 나오느라 겁이 났는데 참가자들이 유쾌한 형태로 묶인 걸 보니 즐거운 투쟁이 자리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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