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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민주주의

입력
2016.11.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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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사전이 ‘포스트 트루스(post-truth, 탈진실)’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고 한다. 이 단어는 미국의 어느 극작가가 1990년대 초반에 쓴 에세이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세상에 등장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정확한 의미가 학자들 사이에서 정의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영국 국민의 국민투표가 브렉시트 찬성으로 이어지고, 미국의 선거결과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최근의 국제 정치 상황을 설명하기에 시의적절한 단어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도 결코 더 나은 상황이 아니다.

민주주의 과정의 작동원리에 관해서는 여러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는 선거제도와 대의제도, 그리고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면 정치적 선택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 각자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 전체적인 합리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바탕에 깔려있다. 그 사회적 합리적 선택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선호에 대한 다원주의적 결집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공화주의적 숙고심의(deliber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관해서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어느 과정을 통해서나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이 공동체의 합리적 선택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 과정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기대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현실의 민주주의 정치과정이 늘 기대했던 것과 같은 바람직한 사회적 합리적 선택의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과정은 그 성공적 작동의 전제인 선거제도와 투표제도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지 않거나 표현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실패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지금까지는 그 실패의 원인인 제도적 문제를 고치면 민주주의 과정이 다시 성공적으로 작동해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선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트루스 사회에서는 민주주의 과정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영국과 미국과 같은 발전된 민주주의 체제를 가진 국가에서도 국민이 이성적인 고민에 따른 객관적이고 합리적 선택보다는 감성적 충동과 주관적 편향에 따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들이 민주주의 절차에 따른 사회적 선택에 있어서도 지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포스트 트루스 사회에서의 대중들은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차분한 성찰을 통한 실체적 진실의 발견, 그리고 그에 터 잡은 합리적인 공동체 의사결정에 이르기보다는, 즉각적으로 제기되는 감성적인 선동과 약속의 메시지에 더 크게 영향을 받고 더 과격한 정치적 선택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현실의 정치적 선택의 배경에는 유럽연합(EU) 체제에서 영국 중소도시 중장년층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 지난 8년간의 민주당 대통령 체제에서 미국 중부 지역의 저학력 백인들의 소외감 등과 같은 구조적인 이유들이 존재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연일 계속되는 정치 스캔들 소식으로 인해 시국은 매우 혼란스럽고 국민의 좌절과 분노는 점점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어 나갈지 현재로썬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앞두고 있고 그 정치적 선택의 결과에 따라 국가의 미래가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정치적으로 매우 발화성이 높은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요소가 잠재해 있다.

부디 지금의 혼란, 좌절, 분노의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사회의 민주주의 과정이 성공적으로 잘 작동해서 현실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과 미래에 대해 냉철한 준비를 해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허성욱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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