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을 통해 예측불능의 ‘트럼프 시대’가 등장하면서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기민한 대응이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사람간의 관계도 그렇지만 국가간 외교도 때가 중요한데 가히 전광석화라 부를만하다. 국가정상으로는 이스라엘, 멕시코, 이집트에 이어 4번째로 전화통화를 하는가 하면, 17일 뉴욕에서 해외정상 중 처음으로 트럼프와 회담하는 주인공이 됐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당선 9일만에 외교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아베 정부는 당초 힐러리 클린턴 후보 쪽에 줄을 선 것처럼 보였다. 아베 총리는 원래 클린턴 후보의 승리를 점치고 이날 뉴욕에서 클린턴을 만나는 일정을 짜놓았다고 한다. 겉으로는 클린턴 당선을 준비하면서 사사에 겐이치로(佐佐江賢一郞) 주미대사가 트럼프의 장녀 이방카 쪽을 접촉하는 등 치밀하게 양쪽을 함께 공략해온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일본 특유의 ‘매뉴얼식 대응’인 셈이다.
세계정세 격변기에 리더의 유능한 판단이나 단합하고 결집하는 일본의 모습이 낯설지는 않다. 전체주의적 특성으로 흐르는 게 문제지만 국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재의 일본정부는 부러움을 자아낸다. 심지어 국가위기엔 평소 원수처럼 치고받는 여야도 따로 없다. 민진당의 렌호(蓮舫) 대표는 아베가 하루만에 트럼프와 통화해 회담날짜를 잡아내자 “매우 다이내믹한 결단이다. 솔직히 평가한다”고 힘을 보탰다. 자민당은 파벌별로 트럼프 인맥찾기에 총력대응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쓸 수는 있어도 국제질서나 타국국민을 위해 비용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는 게 여러 발언에서 드러났다. 고립주의 선언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의 정면충돌 가능성이 훨씬 커졌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이 대목에서도 일본은 미국없이 중국과 맞서야 하는 상황을 착실히 준비해왔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는 중국이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점령할 경우에 대해 일절 언급한바 없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작년 새 안보법에서 한정적이나마 미일간 집단적자위권 행사가 가능토록 사전에 미리 대비해놓은 게 사실이다.
아베는 ‘군사적 보통국가’나 헌법개정 시나리오에도 지금의 분위기를 활용할 수 있다. 자주국방 강화를 주장하는 우익에겐 순풍이 될 조짐이다. 어차피 ‘배려예산’(주일미군에 일본측이 부담하는 비용)’을 증액할 바에야 ‘자위대 증강’에 쓰라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응이다. 중국과 일본 모두에게 한국의 중요성은 더 커지게 됐다. 일본 외교가에선 중국과 맞서기 위해 한국을 확실하게 일본편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상수가 되고 있다. 역으로 한국에겐 중일간 조정자를 자임해 지렛대를 활용하며 국익을 보호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역할을 하겠다고 한국정부가 강조해온 게 한중일정상회의 체제 복원이다. 지금 일본에선 12월 도쿄에서 열릴 한중일회의 개최 여부에 박근혜 대통령이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원망이 적지 않다. 일본인들은 ‘박근혜-최순실판 한류드라마’를 흥미진진하게 보는 중이다. 와이드쇼 같은 연예인이 나오는 방송에서 인물계보도를 그려가며 한국에서 전해지는 갖가지 소문을 전달하고 있다. 이번 사태가 최순실과 호스트바 출신 고영태, 차은택의 삼각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다.
해외매스컴에서 연일 망신을 당하고 있는 한국대통령이 해외로 나와 어떻게 국익을 주장할 수 있겠나. 더구나 박 대통령의 방일은 취임 이래 처음이기 때문에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만약 정상대로라면 오사카(大阪)로 향해 교민행사도 가져야 한다. 차별과 싸워온 재일교포는 다른 어느 나라 교민과도 무게감이 다르다. 그런데 모국의 대통령이 “무당을 옆에 둔 허수아비”였다고 일본 방송에 버젓이 나오는 상황에서 교민행사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쿄=박석원특파원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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