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진 물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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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진 물풀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입력
2016.11.1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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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물고기에게 모자를 뺏긴 큰 물고기가 목격자인 게를 매섭게 노려본다. 모자든 권력이든 원주인에게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시공주니어 제공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존 클라센 글, 그림ㆍ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ㆍ32쪽ㆍ1만1,000원

물고기 한 마리 헤엄쳐 간다. 머리에 중산모 올려 쓰고서. 녀석은 독자들에게 제가 쓴 모자의 내력을 들려준다. “이건 내 모자가 아니야. 그냥 몰래 가져온 거야. 커다란 물고기한테서 슬쩍한 거야.”…도둑질한 모자였구나!

자신의 범죄 행각을 일러준들 책 밖의 독자들은 책 속의 이야기에 개입할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걸 보니 녀석은 교활하고, 자못 의기양양하다. “모자를 가져가는 줄도 모르고 쿨쿨 잠만 자던데? 커다란 물고기는 아마 오랫동안 잠에서 안 깰 거야. 잠에서 깨더라도 모자가 사라진 건 알지 못할 거야. 모자가 사라진 걸 알게 되더라도 내가 가져갔다는 건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내가 가져갔다는 걸 눈치 채더라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를 거야.”

커다란 물고기의 우매를 확신한 녀석은, 자신만만하게 제 행선지를 밝힌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한테만 살짝 말해줄게. 키 크고 굵은 물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에 가는 거야. 그 안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 아무도 날 찾아내지 못할 거야.” 그러나 완전한 범죄가 있을까? 이야기 속에도 목격자가 있으니, 눈알을 길게 빼고 옆으로 걷는 게. 그래도 물고기는 신경 쓰지 않는다. “사실 누가 날 보긴 했어. 하지만 내가 어느 쪽으로 갔는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난 하나도 걱정하지 않아.” 묵인의 대가로 무엇을 주고받았을까?

목격자의 입을 막은 도둑은 이제 자기 행위의 정당성까지 주장한다. “모자를 훔치는 게 나쁘다는 건 알아. 이게 내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냥 내가 가질래. 어쨌든 커다란 물고기한테는 너무 작았어. 나한테는 요렇게 딱 맞는데 말이야!” 그리고 이윽고 ‘그곳’에 다다른다. “와! 드디어 다 왔어! 키 크고 굵은 물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이야!” 쾌재를 부르며 훔친 모자를 마음껏 즐기고자 한다. “내가 잘 해낼 줄 알았다니까. 아무도 날 찾아내지 못할 거야.”

여기까지가 ‘도둑 물고기’가 하는 말을 옮겨 적은, 이 책의 글이 전하는 이야기다. 글만 읽은 독자는 분노가 치밀 법. 하지만 그림책의 이야기는 그림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니, 그림이 보여주는 상황은 도둑 물고기의 기대와는 사뭇 다르다.

커다란 물고기는 도둑 물고기가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할 때 이미 잠에서 깨었고, 도둑이 간 방향을 묵묵히 쫓아갔으며, 그 길에서 마주친 목격자를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아 도둑의 은신처를 알아낸다. 그리고 도둑 물고기가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키 크고 굵은 물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그곳으로 쳐들어간다. 이후 글 없이 그림만 이어지는 몇 장면 뒤에 우리는 커다란 물고기가 모자를 되찾아 쓰고 그곳을 나오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어떤 응징과 단죄가 이루어졌을까? 궁금하지만 작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우리 ‘독자’들은, ‘이야기란 무릇 어떤 현실의 은유’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이야기로써 우리의 현실을 비춰보곤 한다. 권력집단의 교활과 교만과 추한 거래와 파렴치가 만천하에 드러난 이즈음, 이 책 속의 ‘모자’와 ‘도둑 물고기’와 ‘커다란 물고기’, ‘목격자 게’, ‘굵은 물풀들이 빽빽하게 우거진 곳’ 들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런 반성도 없이 거짓과 꼼수로 빠져나갈 길만을 도모하는 저들을 지켜보며, 이 책이 직접 보여주는 대신 독자의 상상에 맡긴 말 없는 마지막 몇 장면 -우거진 물풀 속의 응징과 단죄에 우리 ‘백만 촛불’은 어떤 의지를 투사해야 옳을까.

김장성 그림책 작가ㆍ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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