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이제 반팔십이다. 술 좀 줄이고 이제 몸 생각해라.” 고향 어머니 전화의 참 맛은 기나긴 훈화 끝에 마지막 강조점을 찍고는 뚝 끊어버리기. 반팔십? 대답 없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보니 이제 네 인생도 ‘꺾였단’ 얘기였다.
마흔을 두고 공자는 ‘불혹(不惑)’이라 했다지만, 지학(志學)한다던 열다섯에 공부가 제일 싫었고 이립(而立)한다던 서른에 동굴 같은 자취방에서 연명하지 않았던가. 불혹이란, 어쩌면 어서 빨리 뭔가로 나를 유혹해달라는 음흉한 앙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실’ ‘정직’ ‘나르시시즘’ ‘행복’ ‘미각’ 등 스무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동서양 고전을 읽어 내려가며 ‘마흔앓이’에 대해 풀어내는 ‘마흔의 단어들’(동녘)은, 그래서 전복적이다.
가령 ‘정직함’ 항목을 보자. “가면을 잃어버린 그는 자신의 불안을 공개하고 아무에게나 내민다. 자신의 비밀을 공표한다. 그렇게 무분별한 행동은 우리를 짜증나게 한다.” 나이 마흔 넘어 맨 얼굴의 자기를 드러내면서 진정성 운운하고, 쿨하고 멋지다 하지 말란 얘기다. 오히려 필요한 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예의의 합리적인 마땅함”이다.
‘즐거움’은 또 어떤가. 주문처럼 주워 삼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에 대해선 이렇게 써뒀다. “안빈낙도를 외치며 자신의 가난함을 정당화하는 것은 위선이다. 가난은 ‘낙도’의 결과일 뿐이지 가난하다고 ‘낙도’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낙도’하기 위해 가난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제 안의 욕망을 애써 억누르지 말고, 제대로 된 욕망에 한층 더 충실하라는 권고다.
하여 진짜 익혀야 할 것은 ‘스프레차투라’다. 스프레차투라란, 어려운 일을 무심한 듯 해내는 기술을 뜻한다. 마흔 때까지 “너절해지기도 했고, 비굴해지기도 했으며, 상처도 제법 맛보았고, 무엇보다 패배의 경험도 많고, 도량도 제법 늘어났으니” 이제는 아무 말없이 해치우곤 싱긋 웃어버리란 얘기다. ‘이렇게 소중한 내가 너무나 고생스럽게도 이런 장한 일을 해내었지’라고 치기부릴 때는 지났다는 얘기다.
마흔앓이 책들이 대개 달달한 느낌을 주는데 반해 이 책은 까끌까끌하다. 개인의 보신주의 말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도 다루기 때문이다. 이(利)를 기반으로 상과 벌로 사람을 다스리라고 알려진 ‘한비자’에 대해 오히려 그 핵심은 ‘이(理)’라고 정리한다. “인간의 본성과 이치에 따라 스스로 행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적 환경과 장치들을 먼저 조성”토록 하는 게 합리적이란 설명이다. 세상사에 무심한 게 마음의 평정에 훨씬 도움된다는 에픽테토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오래 살아내었던 중년이라면 개인적 편견과 감정의 휘둘림에 무감각해지되, 사회적으로 정당한 몫에 대해서는 예민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아무래도 주역 연구자로 이름을 얻었고 동서양 고전을 폭넓게 섭렵한 저자 심의용의 힘일 게다. ‘마흔앓이’란 어쩌면, 먹고사니즘 때문에 사회에 대한 생각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몸살인지도 모르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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