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것을 시작했는데 엄마가 사주지 않아요."
지난 16일 방송된 MBC TV드라마 '캐리어를 끄는 여자'의 한 장면이다. 계모에게 학대를 당한 소녀의 말은 앞뒤 상황을 모르면 번역기를 이용해야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풀이하자면 "월경을 시작했는데 엄마가 생리대를 사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생리대를 사지 못해 서러움을 겪는 소녀의 하소연은 낯설지 않다. 단순히 한 소녀의 넋두리로만 볼 수 없는 것은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을 대신 이용했다는 저소득층 소녀의 사연처럼 여성들의 월경에도 사회 문제가 녹아 있기 때문이다.
월경이 ‘볼드모트’도 아닌데…
월경은 우선 말부터 소외된다. 월경은 마음껏 부를 수 없는 침묵의 단어여서 대신 다양한 은어로 불린다. 우리는 그날·생리· 달거리·마법·매직·대자연 등으로 부르고 독일은 딸기, 미국은 이모라고 말한다. 학계에서는 전세계에 걸쳐 월경을 의미하는 은어가 5,000여개일 것으로 추산한다.
소설 ‘해리포터’시리즈에서 등장인물들이 이름을 말하기 두려워하는 악당 볼드모트도 아닌데 왜 마음껏 부르지 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성 담론에 대해 보수적인 우리 사회의 인식도 한 몫 한다. 직장인 전아영(29)씨는 “성생활을 잘 이야기 하지 않는 것처럼 월경도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노골적인 표현을 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월경기간을 알리는 것 같아 생리중이라는 말을 피하게 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 보니 생리대 또한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물건이 됐다. 직장인 최선혜(27)씨는 "어머니께서 생리대는 꼭 별도 주머니(파우치)에 넣어 따로 보관하라고 가르쳐 주신 후 줄곧 그렇게 해왔다”며 “마트에서도 검은 봉지에 넣어 주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밀스러운 물건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생리대 광고도 깨끗함이나 순수함 등을 강조하며 월경혈을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관념을 부추긴다.
이 같은 비밀주의 때문에 여성들이 겪는 월경의 고통도 비밀의 영역에 묻히면서 사회적으로 공감대를 얻기 힘들게 됐다. 당연히 남성들에게는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관심 밖의 일이 돼버렸다. 김연정(28)씨는 “어릴 때 친구들이 생리혈 때문에 냄새가 심하다고 놀린 기억이 있어서 생리대를 착용하면 피비린내가 날까봐 예민해 진다”며 “개당 300원 가량하는 생리대를 마냥 갈아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답답하다”고 말했다.
※ 영상 ▶흔녀들의 월경톡… "왜 말을 못해!"
첫 월경, 그 씁쓸한 추억에 대하여
여성들이 처음 겪는 월경에 대한 기억도 대부분 고통이나 부끄러움으로 연결된다. 월경(月經)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생의 8분의 1에 가까운 시간 동안 겪는 일이지만 첫 만남부터 유쾌하지 않다. 초경(初經)은 대개 10~12세 사이에 시작하는데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당황스럽고 창피한 기억으로 남는다.
대학생 이아름(26·가명)씨에게 초경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12세 때 초경을 한 이씨는 어린이잡지 속 연재소설을 통해 월경 관련 지식을 습득했지만 월경혈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석 달이 지나서야 부모에게 말했다. 이씨는 “팬티에 묻어 나온 분비물이 핏빛이 아니라 갈색이라서 월경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피는 산소에 노출돼 시간이 지나면 갈색으로 산화되는데 이씨가 본 소설에 이런 내용이 없었다.
초경은 곧 성숙한 여성으로서 생식능력을 갖게 된다는 뜻이어서 여성들은 초경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여자다움’을 강요 받는다. 이는 사춘기 소녀들에게 부담이다. 부모님이 초경을 축하하는 의미로 작은 케이크를 사줬다는 이씨 역시 초경이 즐겁지 않았다. 이씨는 “어머니가 생리대 사용법을 알려주며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 됐으니 조심하라고 강조하셔서 축하보다 조심해야 할 일이 늘어났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매 달 겪을 월경에 대한 조언이 ‘은밀하게 치러야 할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견도 있다. 대학생 성지윤(21·가명)씨는 "초경 이후 부모님께서 친구들에게 생리 사실을 알리면 성장이 빠르다는 이유로 놀림감이 될 수 있으니 가급적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며 “그 후 놀림거리이니 감춰야 할 일로 생각했다”고 털어 놓았다.
은밀함 벗고 공론장으로
여성의 ‘은밀한 사생활’이었던 월경이 최근 들어 공론의 장으로 나오고 있다. 드러내 놓고 생리 중이라는 점을 밝히거나 알 수 있도록 표시하는 여성들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브라질 리우 올림픽 수영 경기에 출전했던 수영선수 푸위안후이(20)는 경기 직후 생리중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지난해 런던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키란 간디는 생리용품을 착용하지 않고 마라톤을 완주했다. 모두 월경을 혐오하는 문화에 대한 반항이었다.
국내에서도 월경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한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김보람(29)씨는 월경과 생리대를 주제로 한 ‘피의 연대기’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 그는 이를 통해 여성 인권 신장과 생리용품 역사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 김씨는 “같은 여성이어도 소속된 사회에 따라 월경에 대한 경험이 다르게 나타난다”며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제한된 정보만 습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대안 생리용품의 역사를 훑으며 여성들이 왜 특정 용품만 선택하는지 살펴볼 생각”이라고 다큐멘터리의 제작 의도를 밝혔다.
일부 남성 중에는 월경의 괴로움을 간접 체험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미디어스타트업 ALT의 구현모(25) 기획자는 최근 9시간 동안 생리대를 직접 착용한 체험 영상을 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 올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구 기획자는 토마토주스로 만든 가짜 생리혈이 묻은 생리대를 갈아보는 등 생리 중인 여성의 일상을 간접 경험했다. 그는 “월경은 남성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어서 간접 체험 영상을 기획했다”며 “여자 친구들이 ‘굴을 낳는 기분’이라고 표현해 이해를 못했는데 생리대를 착용해보니 움직이기 불편하고 기분이 찝찝해 여성들의 불편함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안 생리용품’을 발명한 남성도 있다. 황룡(32) 룬랩 대표는 세계 최초로 ‘스마트 생리컵’을 개발했다. 말랑한 고무로 만든 생리컵은 체내에 삽입해 생리혈을 모으는 기구다. 여기에 감지 기능까지 추가해 혈량이나 혈색도 파악할 수 있다. 황씨는 “여자친구가 월경 때 겪는 불편함을 덜어주고 싶어 생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생리컵이 상용화되면 스마트폰용 소프트웨어(앱)로 생리량, 생리주기, 혈액정보 등을 받아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월경과 시민으로서의 권리
여성들만의 이야기를 뛰어넘어 사회 모두가 월경에 대해 관심을 갖는 현상은 세계적 흐름이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는 저소득층 여성들의 생리대 구매가 사회문제로 떠올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뉴욕시는 세계 최초로 ‘공짜 생리대’를 지급했다. 현재 모든 공립학교와 무주택자 쉼터, 교도소에서 여성들에게 탐폰과 패드 등의 생리대를 무료 지급하고 있다. 지급 방법도 마치 휴지처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화장실 등에 비치해 놓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따로 신청하지 않아도 된다.
국내에서도 ‘깔창 생리대’ 논란 이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생리대를 무상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엇박자로 ‘1회성 지원’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택배로 발송해주는 지자체와 달리 복지부의 경우 보건소를 방문해 물품을 받아야 해 여성들이 꺼리고 있다”며 “행정편의주의 정책이라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따라서 월경을 인간의 기본권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모든 여성에게 생리대 무상지급을 공약했던 하윤정 노동당 전 후보는 “월경은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여서 필요한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권리 중 하나”라며 “월경은 임신, 출산 같은 재생산권과 연결되므로 사회가 이를 적극적으로 보장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상 생리대를 지급하자는 논의가 생리 휴가제나 생리 공결제처럼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지 않으려면 사회적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박이은실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교수는 “월경하는 여성의 신체를 비정상적이고 부정적 상태로 여기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월경통을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면 개인이 견뎌야 할 문제이지만 고통의 원인이 여성들의 생활환경, 생태문제 때문에 비롯됐다고 보면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박 교수는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외치라고 주문한다. “월경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자!”
김지현 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최유경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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