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가족과 함께 영국 브라이튼으로 여행을 갔던 중년 직장인 나모씨는 에어비앤비 숙소 주인에게 방 안에 있던 화분을 소개 받았다. “인사하세요. 얘는 스튜어트라고 해요. 올해 열두 살이죠. 여기 머무는 동안 서로 잘 지내세요.” 방 안 가구며 가전제품 등의 사용법을 알려주던 주인이 돌연 ‘스튜어트’를 소개했을 때 처음엔 농담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마치 아들이라도 소개하는 양 너무도 진지했고, 천장까지 타고 올라간 넝쿨식물은 한눈에도 정성 들여 키운 것이 분명했다. 주인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방을 나가며 당부한 말. “우리 스튜어트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주면 좋겠어요.” 그녀에게는 이 화분 속 식물이 반려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반려식물(Pet Plant)이었던 것이다.
반려동물 못지 않은 반려식물
시초는 아마 레옹이었을 것이다. 영화 ‘레옹’의 고독한 킬러에게 생의 애착을 불러일으켰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화분 속 식물이었다. 총질을 해대는 생사의 순간에도 화분 하나를 꼭 끼고 있던 유랑자 레옹은 피보호자이자 연인이기도 했던 조숙한 소녀 마틸다에게 이 화분을 남기고 죽는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려 주며 말 없는 위로를 전해주는 식물은 침묵 속의 킬러가 유일하게 입을 열어 언어를 뱉어내게 만드는 생의 반려자였다.
한국사회에서도 식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다. 동물이 애완의 대상에서 반려의 존재로 승격된 것처럼, 식물도 관상의 대상에서 반려의 존재로 그 지위와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 식물에 대한 갈구가 높아지면서 집안을 정원이나 숲처럼 꾸미는 플랜테리어(플랜트+인테리어)가 각광받고, 핫 플레이스의 카페들은 가드닝을 콘셉트로 삼는 게 대유행이지만, 반려식물은 차원이 다른 변화다. 이제껏 식물은 습도 조절이나 전자파 차단을 위한 또는 산소와 피톤치드를 한껏 흡입하기 위한 기능적 대상이었다. 하지만 심리적, 정서적 애착의 대상으로 식물을 키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지난해부터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기 시작했다. 레옹처럼 식물을 생의 반려로 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식물 키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주로 중장년층 주부들이었어요. 따먹을 수 있는 채소 위주의 실용적인 용도가 대부분이었고요. 하지만 요새는 젊은 세대, 특히 혼자 사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이 힐링의 방편으로 식물 키우기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지난해 7월 다육식물 전문 매장을 오픈한 천경화 가든스튜디오 대표가 서울 강남구 가로수길에 터를 잡은 이유다. 헬조선으로 불리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영혼이 ‘털리도록’ 힘겹게 살아가는 n포세대, 그들이 생명을 키우며 얻는 치유와 위안을 자연스레 갈망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선물로 판매되는 화분이라는 게 과거에는 대부분 기업체 주문, 중년 세대의 창업 축하용이었다면 요즘은 젊은이들이 서로 주고 받는 선물로 인기가 높다.
선인장, 너처럼 척박한 환경 이겨낼게
“식물도 유행을 타요. 식물 중에서도 다육식물, 그 중에서도 선인장이 요즘엔 가장 인기가 뜨겁죠.” 체내 수분이 많은 다육식물은 ‘다육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사랑 받아 왔지만, 선인장은 다종다양한 모양과 형태를 자랑하며 최근 컬렉터까지 양산할 정도로 핫하다. 예상 밖의 형태, 특이한 모양이 많아 골라 키우는 재미가 있고, 온갖 소품들과 어울려 꾸미는 즐거움까지 주기 때문이다. 무의식 차원에서는 선인장이 서식하는 사막지대의 척박한 환경 자체가 헬조선의 메타포로 작용하는 것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선인장이 대세라니, 헬조선뿐 아니라 브렉시트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도 선인장 인기의 견인차일지 모른다.
숨막히는 회색도시의 불황 속에서 강인하게 솟아난 선인장의 가시를 보는 일은 실로 적잖은 위안을 준다. 하지만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다육식물이 전반적으로 키우기 쉽지만, 선인장은 그 중에서도 가장 쉬운 축에 속한다. “화분을 선물로 많이 하는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살려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반갑지 않은 선물일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선인장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나도록 진화한 식물이라 그런 부담이 적죠. 한 달에 한번 정도만 물을 주면 어디서든지 잘 자라거든요.” 선인장은 수명도 150~300년에 이르러 지금 내가 잘 키우기만 하면 증손주는 물론 5대손까지도 물려줄 수 있다. 후손을 남기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도 일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반려자라는 진득한 감정이 생겨난다.
선인장을 꾸미는 재미도 만만찮다. 젊은이들의 반려식물에는 위트가 넘친다. 양팔 벌린 선인장 ‘용신목’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듬직하게 현관문을 지키는 게 꼭 “여보, 나 왔어”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둥글고 뾰족한 선인장마다 작은 피규어들을 얹어 하나의 세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서사공간으로 꾸밀 수도 있다.
반려식물은 배신하지 않는다
반려동물보다 손이 적게 가고, 돈도 적게 드는 것이 반려식물의 매력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아니다. 경기 하남시에 사는 회사원 송진우(30)씨는 ‘반려’로 지칭할 정도로 식물을 아끼는 이유로 “내가 공들이는 만큼 보답을 해주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힐링이죠. 사람들한테는 배신 당해도 식물들한테는 배신당하는 일이 없거든요.” 송씨는 “식물은 모션은 없지만 일교차나 물주기에 따라서 잎장 크기나 색감이 달라진다”며 “그런 변화를 보면서 살아있다고, 저와 소통한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서울 관악구에 사는 최은영(28ㆍ회사원)씨는 틸란드시아 이오난사 등 20여개의 반려식물을 키운다. “식물이지만 저는 이 아이들과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감정도 공유합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 아이들이 서로 질투를 하기도 해요. 새 화분을 들여오면 갑자기 기존에 있던 애들이 폭풍 성장을 한다거나 누군가 먼저 싹을 내면 다른 애들도 새싹을 내는 식으로요. 저에게 잘 보이려고 이쁜 짓들을 하는 거죠.”
말이 없다는 것은 반려식물의 가장 큰 매력이다. 우리의 삶은 너무 소란스럽다. 항상 일과 사람에 치여 살고, 그 모든 과정을 말이 매개한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야심차게 24시간 전 세계 사람들을 연결하겠다는 SNS가 있다. 어디에나 말이 넘쳐흐른다. “반려동물은 직접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반면 말을 안 들을 때도 있잖아요. 돌보는 데도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하고요. 하지만 반려식물은 한없이 가만히 있어 주기 때문에 사람을 온화하고 차분하게 만들어줘요. 언제나 한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친구가 있다는 게 큰 위로가 되죠.” 반려동물과 반려식물을 모두 키우는 천경화 대표는 “반려식물도 특히 애착이 가는 아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라며 “키우다 보면 말 없이 귀 기울여주는 식물을 향해 자꾸 말을 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려식물이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려동물도 마찬가지지만, 반려식물의 죽음 역시 애달프고 가슴 아리다. 더욱이 식물은 어디가 아픈지 알기도 어렵고, 안고 뛰어갈 병원도 없다. 게다가 키우는 사람의 잘못으로 죽는 경우가 많아 죄책감도 크다. 그냥 죽어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여러 차례 반려식물의 죽음을 겪은 최은영씨는 그래서 “반려식물을 키울 때는 내가 이 아이를 꼭 잘 돌보고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너무 식물 키우는 걸 쉽게들 생각하시든 것 같아요. 초심자 대부분이 ‘잘 안 죽는 거 주세요’ 하고 식물을 고르는데, 그런 마음으로 산다는 게 참 안타까워요.”
가드닝 분야 네이버 파워블로거인 ‘그라마루’(닉네임)씨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23년 된 반려식물 로즈마리를 껴안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1993년 여름, 아이 출산을 기념해 산 작은 화분에서 지금은 베란다 천장에 닿을 정도로 우뚝하게 자라난 로즈마리는 말 그대로 이 가정의 반려자이자 산 증인이다. “오랜 기간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있었기에 더 없이 위안이 되는 아이죠. 반려식물은 늘, 한결같이, 거짓 없이 그 자리에서 지켜봐 주죠. 요즘 같이 혼란스럽고 심란한 시기에는 더더욱이요. 모든 스위치를 내리고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면 그곳엔 늘 나의 반려식물 로즈마리가 있어 날 위로해 주듯 말없이 안아줘요. 한없이 평온해지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그런 넉넉한 마음이 자리하게 된답니다.”
최순실, 박근혜, 정유라, 장시호, 우병우, 안종범, 정호성…. 이런 이름들이 가슴 속에 천불을 일으키는 요즘, 말없이 들어주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배신 따윈 모르는 반려식물 하나 가져보는 건 어떨까. 세상을 긍정하고 희망을 발아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어쩌면 거기서 길어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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