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 “꺼지지 않게” 의지
청계광장 등 전국 주요 장소에
‘대통령 하야’ 문구 메모 빼곡히
퇴진 푯말 붙이고 지리산 등정
제주 윗세오름엔 시국선언문
음식점ㆍ주점 ‘촛불세트메뉴’ 등장
SNS 프로필 사진에 형상화도
13,14일 이틀간 지리산을 등반한 이현임(53)씨 부부는 산행을 함께 한 지인 4명과 등산가방에 ‘박근혜 퇴진’이라고 적힌 푯말을 붙이고 천왕봉 정상(1,915m)에 올랐다.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오후 내내 부도덕한 정권을 향해 비판 목소리를 높인 뒤 여운을 이어가고 싶어서였다. 매주 전국 명산을 찾을 만큼 등산 마니아인 부부는 당시 열기를 되살릴 방법을 찾다가 집회 현장에서 받아 온 푯말을 챙겨 산으로 향했다. 이씨는 15일 “100만 시민의 외침이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박 대통령에게서 국정운영 포기 선언을 받아 내게 하려면 촛불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문구를 본 등산객들도 적극적으로 공감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11ㆍ12 촛불항쟁 이후 정권 퇴진을 바라는 여론이 잦아들까 우려한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촛불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전국 명소에 국민의 염원을 담은 포스트잇과 시국선언문이 내걸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촛불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넘쳐난다.
서울 도심 곳곳에는 촛불집회에서 확인된 시민들의 공분이 포스트잇 글귀로 옮겨지고 있다. 지난달 청계광장에 설치된 시국선언 게시판은 이미 빈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가득 찼고, 서울시청 인근까지 산발적으로 포스트잇이 나붙은 상태다. 직장인 최모(27)씨는 출ㆍ퇴근 길마다 ‘박근혜 하야’ 문구가 담긴 포스트잇을 시청역사와 광화문 인근에 붙이고 있다. 최씨는 “박 대통령 퇴진 여론이 12일 집회에서 정점을 찍었는데 하향세를 탈까 봐 걱정”이라며 “사안의 심각성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 주요 장소에도 시국선언문은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다. 70대 어르신 3명이 12일 제주 한라산 윗세오름의 한 산장 벽에 붙여 놓은 시국선언문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관광객 전민영(36)씨는 “오름 중턱 한 쪽에 ‘선량한 국민의 삶을 욕되게 말고 집권자들은 소멸하라’라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보고 집회 후 일상에 매몰됐던 정신이 번뜩 깨어난 느낌이 들었다”고 전했다. 대구 동성로 한복판에는 길이 70m짜리 ‘A4 데모’ 패널이 설치돼 성난 민심을 대변한다.
번화가 상점 주인들도 ‘촛불 불씨 살리기’에 동참하고 있다. 정권 퇴진 구호를 빼곡히 달아 놓은 가게부터 집회참가 인증 사진을 보여주면 할인을 더 해주는 식당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시민들과 공감을 나눈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호프집을 운영하는 홍혜주(37ㆍ여)씨는 “광화문 집회를 보면서 촛불의 힘은 생활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가게 입구에 정권퇴진 문구를 붙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남양주의 한 식당 주인 심창호(41)씨도 “촛불집회의 축제 분위기를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국밥과 녹두전, 막걸리로 구성된 ‘국민촛불 세트’를 만들어 원래 가격보다 6,000원 할인해 팔고 있다”며 “버는 돈이 조금 줄더라도 국민의 바람이 이뤄질 때까지 응원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온라인에서도 촛불 물결은 여전히 넘실댄다. 집회 현장의 불빛을 휴대폰 메신저나 SNS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한 네티즌이 늘었고, 예술인들도 관련 작품을 만들어 무료 배포하고 있다. 박근혜 하야 캘리그래피(미적 표현을 가미한 손글씨)를 만든 작가 박은지(25)씨는 “시민들도 손쉽게 작품을 활용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풍자를 강조한 글씨를 SNS에 올렸는데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말했다.
촛불집회 여파는 업계에도 미치고 있다. 온라인 음악서비스 업체 멜론 관계자는 “시국 관련 곡들은 대개 제작자가 무료로 배포하기 때문에 유료 음원 사이트에 등록을 하지 않는데 서비스를 해달라는 고객 요청이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 대형 서점 관계자도 “대학가와 시민단체들의 시국선언문을 한 데 모아 놓은 도서를 찾는 고객 문의가 빗발쳐 코너를 따로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주형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깨닫고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며 “박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는 한 촛불정신을 구현하려는 일상 속 시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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