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억 달러(약 9조3,760억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미국 자동차 전장(電裝) 전문 기업 하만(Harman)을 인수하겠다며 써 낸 금액이다. 지난달 27일 삼성전자 등기이사로 선임되며 책임 경영 전면에 나선 이 부회장은 삼성의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첫 번째 카드로 초대형 인수ㆍ합병(M&A)을 꺼내 들었다. 이 부회장의 승부수가 부친인 이건희 삼성 회장의 못다 이룬 꿈인 자동차 사업에서 어떤 성과를 낼 지 주목된다.
삼성전자가 하만을 인수한 것은 무엇보다 기존 주력 분야인 전자 부문과 신성장 분야로 정한 전장 사업과의 시너지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는 커넥티드카용 전장 사업에 적용 가능한 정보기술(IT)과 모바일 기술, 각종 전기ㆍ전자 부품 사업 등에서는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장 사업에 대한 노하우와 고객 네트워크 등에서는 역량 강화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난해 12월 전장사업팀 신설 이후 사업 기반과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업체들을 대상으로 전략적 적합성과 협력 가능성을 타진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업계에선 모바일과 생활가전 등에서 경쟁력을 확보한 삼성전자에 글로벌 전장 사업에서 입지를 다진 하만의 차별화한 사업 능력이 접목될 경우 기대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하만의 역량을 결합해 자동차 업체에 토털 솔루션을 공급할 계획”이라며 “소비자에게 한 차원 높은 사용자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만 인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이 부회장의 관심도를 감안할 때 추가 M&A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이탈리아 자동차 업체인 피아트 크라이슬러의 부품 회사 인수 건에 대해 삼성전자는 “논의한 바 있지만 코멘트 할 게 없다”며 정확한 입장 표명을 유보한 상태다.
이 부회장의 이번 인수가 삼성이 다시 자동차 사업에 본격 진출하는 신호탄이 될 지도 관심사다. 사실 삼성과 자동차 사업의 인연은 깊다. 자동차 마니아인 이건희 삼성 회장은 신경영 선언 직후인 지난 1993년8월 “앞으로 자동차에 전기나 전자 비중이 커질 텐데, 삼성이 거기에 강점이 있다”며 자동차 사업 의지를 피력했다. 이후 95년 자동차 산업에 진출한 삼성은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프랑스 르노그룹과 자동차 사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삼성은 여론과 정부의 압박에 2000년 결국 자동차 사업에서 철수했다.
업계에선 삼성이 전통적인 내연 기관 자동차가 아닌 미래 스마트카 사업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삼성SDI와 자동차 전장 부품을 제조하는 삼성전기, 삼성디스플레이 등 계열사 역량을 합칠 경우 이미 스마트카를 상당 부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의 이번 인수로 10여년 전부터 전장 분야에 진출한 LG전자와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LG전자는 카인포테인먼트에서 출발해 구동모터와 인버터(직류 전기를 교류로 변환하고 모터를 제어하는 장치), 배터리팩, 전력분배모듈 등으로 사업 영역 확장에 주력하고 있다. LG전자는 또 자율주행차 프로젝트 강화를 위해서는 구글 등과 협력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하만 인수를 통한 전장사업 진출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선은 일단 긍정적이다. 서준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이번 인수를 통해 추진하려는 것이 차량 제조가 아니라 인포테인먼트와 텔레메틱스 분야란 점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선택”이라며 “삼성전자는 자율 주행을 위한 D램 반도체는 물론 각종 계기판과 에어컨 등 공조 제품까지 납품할 수 있는 만큼 기존 사업부와 시너지가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삼성 관계자는 “공격적인 대규모 인수ㆍ합병 소식으로 임직원들의 사기 진작에도 큰 효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허재경기자 ricky@hankookilbo.com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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