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도박을 한다는 걸 처음 안 건 25년 전, 결혼을 앞둔 때였어요. 제 친정오빠 결혼식에 입을 예복을 사러 가는데, 월급을 다 써버렸다는 거예요. “실수로 도박을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비는데, 없는 돈에 카드할부로 옷을 사 주면서 그 약속을 믿었네요.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그만두고, 저녁이면 나가 그 다음날에야 돌아오던 남편. 내일이 명절인데도 들어오지 않고 당일 아침이 돼서야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던 그를 시어머니도 어쩌지 못했습니다. 제가 얘기 좀 하자면 소리를 지르거나, 문을 쾅 닫기 일쑤였고요.
6개월이면 한번씩 죽고 싶었습니다. 외박을 하고 돌아온 날은 미안했는지 함께 외출을 하기도 했지만, 도박판에 가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제겐 더 큰 고통이었어요. 늘 불안했습니다. 결혼 3년 후 제가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며 집에 목돈이 생겼지만, 어린이날 아이들과 놀이동산 한번 가질 못했습니다. 시간이 없다, 피곤하다, 당신이 가고 싶으니까 애들 핑계 대는 거 아니냐, 남편은 저를 나무라기만 했어요.
결혼 후 15년간 남편의 도박과 씨름하며, 자해를 해볼까, 다 버리고 집을 나가버릴까, 온갖 생각을 다 해봤지만, 그런 다음날이면 둘째 딸이 꼭 아팠습니다. 둘째 딸의 탈장을 발견할 날도, 아이가 창문을 깨뜨려 팔뚝을 다친 날도, 자전거 페달에 발이 끼어 상처가 깊이 난 날도 모두 남편과 싸운 다음날이었어요. 나는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나. 친구들이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아이들을 내보낸 후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울기만 한 날이 셀 수 없습니다. 머리를 남자처럼 짧게 잘라보기도 했어요. 아무 소용 없었지만.
어리석게도 제 마음을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표현해 애들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어요. 이혼하고 싶다, 죽고 싶다, 제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요. 제가 남편에 대한 미움으로 아이들을 귀찮게 여기고 짜증을 낼 때마다, 오히려 애들은 ‘엄마 스트레스 받은 거면 친구들과 놀다 와’라고 말하곤 했죠. 우리 엄마도 경제적 능력이 없던 아버지와 매일 싸우면서 말 한 마디 안하고 일만 다니셨는데, 그런 답답한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 일찍 결혼했는데, 제 삶 또한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닥이면 아버지는 엄마와 싸우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죽는다고 울부짖으며 강둑으로 내려갔어요. 엄마 다리를 붙잡고 나도 같이 죽겠다고 울던 어린 제 모습이 많이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대화 한 마디 없이 늘 참으며 한숨만 쉬던 엄마는 ‘자식 많은 집엔 바람 잘 날이 없다더니, 내가 너희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이렇게 산다’며 우리에게 쏟아 붓곤 했었죠.
다행히 남편은 10년 전 도박을 끊었습니다. 축구를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 볼링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갑니다. 지인들과 운동하며 도박을 끊은 지라 고마움이 크지만, 취미생활에 너무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면 예전 상처가 고스란히 되살아나요. 남자의 권위를 앞세우거나 고지식하게 굴 때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아이들의 얘기를 묵살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옛일이 생각나 견디기 어렵습니다.
20년 전 남편의 도박판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어요. 그때 다섯 살 큰 딸아이가 무심코 ‘엄마가 전화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들은 남편이 제 뺨을 때렸어요. 아이들은 놀라 울고불고…. 그때 기억이 죽어도 잊혀지지 않아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세 살 아들 손을 잡고 봉사활동을 다니며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키던 날들. 사람들은 다들 저더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요. 남편이 도박을 끊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참는 것은 아무도 못한다고요. 그럴 때면 저도 제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아빠의 당구 취미도 심하다며 여전히 못마땅해 합니다. 아빠에 대한 반발심이 커 아빠 말에 대들고 반항하는 일이 잦습니다. “변해가는 아빠의 모습을 보자, 도박을 끊은 건 대단한 거다” 하고 아이들을 달래고 있지만, 잘 되질 않아요. 겉보기엔 풍파 없는 평온한 집안처럼 보이지만, 늘 생활 아래에는 저와 아이들의 불안이 흐르고 있죠. 제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서 사랑의 끈이 될 수 있을까요?”
(임현진ㆍ가명, 46세, 회사원)
“현진씨. 당신은 참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에요. 품성도 좋고, 바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겠어요. 하지만 현진씨가 자라온 환경은 혼란스러웠던 것 같아요. 현진씨의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엄마가 죽어라 일해서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감사는커녕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아이들은 엄청나게 혼란스럽습니다. 쉽게 말해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할지 모르는 거죠. 공격적 행동을 하는 주체와 경제적 능력이나 지위 등의 파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동일인인 경우보다 훨씬 혼란스럽습니다. 할머니는 아마도 ‘에미가 돈 좀 벌어온다고 너를 무시한다’고 속닥거렸을 테고,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고, 어머니는 울며 죽겠다고 하고…. 옳은 것을 옳다고 받아들이지 않고, 정당한 것에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며, 고마운 것을 고맙다고 느끼지 않는 환경에서 현진씨는 살아온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중요한 위기상황에서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결정해야 할지 가치관이나 기준 같은 것이 흔들리게 됩니다. 맞는 말을 했을 때 맞다고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살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면 아예 입을 닫고 말을 안 하죠. 말해봤자 소용 없고,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무력감이 체득되는 겁니다.
“늬 아버지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힘들지만, 내가 죽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 이유는 너희들이 소중해서야.” 현진씨 어머니가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실은 그 반대였죠. “자식이 많으면 바람 잘 날이 없다고 너희 때문에 내가 못 죽는 거다”라고 말하셨어요. 현진씨에게는 아버지의 무능함이나 폭력보다 어머니의 이 말이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쳤을 거예요. 이건 부모가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에요. 내가 나를 낳아준 엄마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이 부정되는, 오히려 엄마 인생의 발목을 잡는 짐이라는 존재의 부정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현진씨 어머니는 표현을 그렇게 했던 거지 진짜 속마음은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못 떠나셨을 거예요. 그러나 어린 현진씨는 얼마나 엄마에게 미안하고 죄책감을 느꼈을까요. 문제의 근원은 남편과의 갈등인데, 어머니는 그 원인을 자녀들 탓으로 돌렸어요. 이것은 투사(projection)입니다. 아버지는 자기 무능을 어머니에게 투사하고,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자녀에게 투사한 거예요. 다행히 현진씨는 자녀들에게 이런 투사를 하지 않은 것 같아요. 참 잘한 일이에요.
현진씨에게 결혼은 혼란스럽고 불필요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집으로부터의 대탈출이자, 서로 사랑하고 보호해주는 온정적 가정을 현진씨의 힘으로 탄생시키는 출발을 의미했을 거예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편은 도박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어요. 도박하는 사람들은 도박 자체가 엄청난 문제라는 자기 문제인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제나 문제를 남한테 투사해요. 기분이 안 좋아서, 구경만 하려고, 배우자가 바가지를 긁어서, 돈을 많이 따서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등등. 도박에서 볼링으로 그 대상이 바뀐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일 수도 있어요. 현진씨 남편은 여전히 중독 성향에 몰두돼 있지 않으면 자기 안의 많은 정서적, 심리적 부분들을 해결 못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현진씨 마음 속에서는 도박이라는 엄청나게 나쁜 문제가 볼링이라는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것으로 바뀐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있지요. 하지만 볼링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한다거나 많은 액수의 내기를 건다면 이건 취미가 아니라 도박의 습성으로 봐야 할 수도 있습니다.
현진씨 자녀들은 지금 남편의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고 있어요. “아빠 저러는 것도 심한 거야.” 하지만 현진씨는 두렵습니다. 이게 혹시 남편의 불안을 건드려 예전으로 돌아가게 하면 어떡하나, 남편의 질 낮은 도박이라는 방어기제를 자극해서 다시 손대게 하면 어쩌나 공포스럽죠. 그래서 자꾸 아이들을 어르고 달랩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부딪칠 때 혹시 “아버지한테 그렇게 하면 안 돼”라거나 “아버지가 너희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같은 말을 하는지 스스로 잘 살펴보세요. 그렇게 하고 있다면 곤란합니다. 현진씨가 어린 시절 느꼈던 혼란과 무력감을 자녀들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자녀들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해요. 애들한테 남편 흉을 보라는 게 아닙니다. 자녀들이 느끼는 분노, 불만, 옳지 않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인정해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거예요. “아빠한테 화나는 게 당연하지”, “엄마도 그건 아빠가 고쳐야 된다고 봐. 중독 성향이라고 볼 수 있지.” 이런 말들을 현진씨 입 밖으로 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평생 맞는 생각을 하고도 맞다고 인정 받지 못했고, 엄마를 덜 힘들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엄마의 짐이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에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어요. “얘들아.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나은 거니” 이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게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나쁜 상태로 후퇴할까 봐 두렵고, 두려워서 본질을 직면하지 못하는 거예요.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훈계와 잔소리를 참으라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과도하게 참고 부모에게 맞춰야만 버려지지 않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던 현진씨의 무의식 속 갈등을 답습시키는 거예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고 해서 꼭 싫어하는 것은 아니에요. ‘너흰 아버지를 증오하니?’ 물어보세요. ‘그렇진 않아요’라고 말할 거예요. 그 정도면 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도박하고 속을 썩였으니 너희가 어떻게 아버지를 존경을 하겠니. 이해한다.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래라 저래라 말하면 귀에 안 들어오지.” 이렇게 인정해줘야 자녀들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옳구나’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극도로 증오스럽거나 웬수 같진 않지만, ‘세상은 이렇게 사는 거야’ 그런 말을 하면 좀 싫어요.” 이 정도로만 자녀들이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현진씨의 희생과 인내를 주변 많은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고 칭찬해준다고 했죠? 현진씨는 그러한 인정과 칭찬을 생의 거름으로 삼아 힘을 내어 인생을 살아왔을 겁니다. 현진씨의 성실과 선량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정신과의사로서 작정하고 냉정하게 말할게요. 이 말도 안 되는 남자를 참아온 걸로 자기 존재를 인정 받는 것, 자신은 괴롭지만 문제 있는 배우자의 뒤치다꺼리를 하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내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그걸로 현진씨 마음이 편해지는 것, 이것을 더 이상 유지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의 격려와 지지로 현진씨가 괴로운 상황에서 힘든 것을 과도하게 참고 그 과정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을 계속하라고 하는 건 안 하렵니다. 물론 현진씨의 희생 덕분에 자녀들이 잘 크고 가정이 유지된 것은 훌륭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걸 칭찬함으로써 현진씨의 해결되지 않은 핵심갈등을 적당히 봉합하는 일을 저만큼은 안 하겠습니다. 당신은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까지 뽑아 또 억지로 참고 견딜 테니까요. 현진씨. 이제는 됐어요. 너무 많이 참고 희생했습니다. 평생 할 걸 넘치도록 했어요.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부당하게 참고 과도하게 견디는 것, 이건 너무 가여운 거예요. 현진씨는 더 이상 존재를 확인 받지 않아도 정말로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에요. 당신 같은 사람만 있으면 우리나라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그런 나라가 될 거예요.
이젠 현진씨와 남편의 문제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남편의 도박은 어떤 수를 써도 현진씨가 해결하기 어려운 남편의 문제입니다. 볼링 치는 것에 대해 남편을 통제하려 들면 큰 문제가 생길 거예요. 남편에게 선을 제시하지 말고, 현진씨 맘에 선을 그으세요. 다시 도박을 하면 떠나겠다, 볼링을 쳐도 외박을 수시로 한다든가 내기 돈이 크다면 용납하지 않겠다, 식으로 자기 기준을 세우세요. ‘문제의 근원은 남편의 도박이고,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맞는 말을 하는 거다, 나는 옳다’는 나의 기준을 만드세요. 상대가 협조 안 하면 내가 나의 기준에 맞춰 결정하는 것들을 늘려 가야 합니다. 그래야 현진씨의 삶이 행복해지고, 남편도 아내를 약간은 어려워할 겁니다. 이젠 자녀들도 많이 컸잖아요. 현진씨 자신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하세요. 이젠 누구의 엄마, 아내보다 현진씨 자신의 비중이 더 많아져야 해요. 당신이라는 존재 덕분에 남편도 조금이나마 변하고 아이들도 잘 자랐지만, 현진씨는 원래 이것만으로 인정되는 그런 작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정리=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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