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에 밀린 백인 남성 노동자
경제 위기 겪으며 감성적 투표
대공황에 낙망했던 독일인 닮아
2000년대 중반, 미국 TV에 나오는 광고 하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광고는 미국을 대표하는 제너럴모터스의 자동차 광고였는데, 콘셉트가 이전 것들과 사뭇 달랐다. 보통 자동차 광고, 특히 미국 회사 제품의 경우 시원한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을 보여주며 그것의 스펙, 그 중에서도 엔진이나 마력을 자랑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본 광고는 자동차 선전이라기에 무색할 정도로 차체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백인 남자 목소리로 구성진(?) 노래가 배경에 깔리며 화면은 미국의 공장 주변과 농장 풍경을 유유히 비추기만 했다. 그 풍경 속에는 정차된 제너럴모터스의 트럭들과 ‘일하는’ 백인 남자들이 함께 있었다. 곧 광고 속 목소리는 “이 나라는 나와 당신 같은 사람들의 것이야” “이것이 우리의 나라야”라고 노래했다.
이 광고가 어필하려 했던 이들, 즉 미국의 ‘일하는’ 남자들이 이번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이들은 미국은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백인들이 스스로의 육체노동을 통해 건설한 국가이며, 자신들이 이런 미국적 가치를 대표한다고 믿는다. 이들이 보기에 미국의 주인공은 ‘말과 계산’으로 먹고 사는 변호사나 회계사 등의 전문직 엘리트들은 아니며, 이국 문화를 간직한 유색인종과 이민자들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 최근 세계화와 경제 위기는 자신들의 실질 임금과 사회적 지위에 지속적으로 타격을 주며 미국 사회의 주역을 바꾸는 느낌이다. 미국적 가치의 대표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이 크게 흔들림을 느끼자, 그들은 선거에서 이전보다 감성적인 결단을 내렸다. 그 눈꼴신 새 주역들을 끌어내리고 무대를 정리해 줄 것 같은 정치인의 말이 합리성과 일관성을 갖춘 정책 제안보다 귀에 훨씬 잘 들어온 것이다.
지금 미국 1차대전 후 독일과 유사
오늘날 미국의 ‘일하는’ 남자들처럼, 체제의 주인공으로 자부하던 이들이 경제적 타격을 입으며 감성 정치에 말려들고 그 결과로 비민주적 정치세력이 대두했던 사례는 20세기 이후 서양 세계에 드물지 않았다. 최근 유럽 극우 정당들의 약진 현상은 가장 비근한 예이며, 아마도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유럽, 특히 독일의 경우일 것이다.
당시 독일의 젊은 월급쟁이들은 애국심이 바탕이 된 건실한 사회생활 태도를 통해 안정된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꾸며, 자신들이 그 가치의 주인공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1920년대 초의 인플레이션 그리고 1929년 대공황으로 처참하게 무너졌을 때, 그들은 감성적 정치 구호에 급격히 쏠리게 되었다.
그 과정의 전형은 이랬다. 1914년 발발한 전쟁으로 그들은 군에 차출되었다. 전장은 참혹하고 잔혹한 공간이었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로 버텨냈다. 전장에서 사라져간 전우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패전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은 더 커졌다. 하지만 전후에 사회로 복귀했을 때, 자신과 같은 애국자들에 대한 대우는 가혹하기만 한 것 같았다. 돌아가야 할 직장은 패전 후 경제 붕괴 탓에 상당수가 문을 닫았다. 직장이 살아 남아있어도, 전시에 동원되었던 여성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노고에 고마운 감정은커녕, 내 자리를 뺏은 여자들에 대한 혐오만 생긴다.
사회, 심지어 가정에서의 시선도 달갑지 않다. 전선에서 어렵게 살아 돌아왔지만 환대는 잠시뿐, 곧 경제적으로 능력 없는 남자 취급을 받기 시작한다. 전쟁 전 모아둔 저축이나 참전의 대가로 얻은 연금 등도 인플레이션 탓에 별 소용이 없다. 이것이 전장에서 목숨 바쳐 싸운 결과라곤 도저히 믿기 어렵다. 삶이 허탈하고 절망적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모두는 독일이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고, 그 패배는 독일의 단결을 방해한 사회주의자와 지식인들 때문이며, 그들 중에는 유대인이 많다. 그러고 보니 내 저축과 연금이 날라 간 것도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금융권 때문 같다. 주위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이 꽤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정치 강령으로 옮겨 놓은 정당도 보인다. 그들의 연설을 듣거나, 집회에 참석하면 절망적이고 허탈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1920년대 중후반, 다시 직장이 생겨 과거의 건실한 생활로 돌아가 보려 했지만, 결국 1929년 말의 대공황은 그 마지막 희망까지 다 부수어버렸다.
권력은 ‘차악’ 바라는 기득권 좌우
이제, 합리적으로 무언가를 설명하고 논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내 삶을 이렇게 만든 적들이 눈앞에 있고 이들을 안 보이게 만들어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솔깃하다. 바로 이런 사회 분위기가 반영된 투표 결과를 통해 그 악명 높은 나치는 중앙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성 투표와 비민주적 세력의 대두가 나치나 트럼프의 경우처럼 궁극적인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던 역사적 사례는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낙망한 대중들이 만든 사회 분위기가 감성 호소적 정치세력을 성장하게 만든 배경이 된 경우는 자주 있었지만 이들에게 정권까지 안겨주었던 경우는 드물었다. 이 두 가지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고리가 하나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이 아닌, 기득권층의 ‘선택’이었다.
기득권층, 포퓰리즘 지지 않지만
샌더스 등 급진 진보세력 약진에
특권 유지하려 극우 정치인 지원
기득권층이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들의 보수주의는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트럼프나 나치처럼 낙망한 대중들에게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정치세력을 반기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 호소는 계급적 불만을 자극하면서 자칫 대중의 정서를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심각해지고 장기화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런 때는 그들의 특권과 자산에 더 직접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이른바 ‘진보’가 힘을 얻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권의 구조로 위기 국면을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 또는 그 구조를 대체할 것만 같은 진보 세력의 약진이 두드러질 때, 기득권층은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1930년대 초 독일의 대지주들과 대자본가들, 그리고 금융 엘리트들은 대공황 와중에 부상하는 급진적 사회주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나치를 지원했다. 적어도 이 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소유권과 특권을 직접 겨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판이야 어떻게 뒤집히든, 최소한 자신들 자산의 근간인 사회경제 질서가 흔들리게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극우 감성호소’ 한국도 예외 아냐
미국의 기득권층, 특히 공화당 주류들도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비도덕적, 그리고 대중추수주의 발언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트럼프는 당 내 경선이 시작될 때만 해도 1920년대 중엽의 나치처럼 낙망한 대중들의 감성에 의존하는 잠재적 세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일하는’ 이들에게 큰 반향을 얻자, 트럼프를 포용하는 공화당 인사들은 급격히 늘어 갔다. 미국 기득권층의 타협이 시작된 징표였다. 기존 정치구조의 외부에서 새 정당으로 시작했던 히틀러와 달리, 트럼프는 공화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움직였기에 그와 기득권층의 융화 장면은 선명히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 속에 고조된 사회적 불만 속에, 진보 세력의 약진을 ‘더’ 걱정한 기득권층의 선택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당연히 그의 향후 정국 운영 방향은 그의 포퓰리스트적 공약들과 기득권층의 이해관계가 어느 즈음에서 타협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한국은 전세계적 현상인 이 같은 감성호소적 정치와 무관한가? 우리도 역시 그 배경으로 기능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질서, 그리고 긴 불황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야기한 물리적, 심리적 타격은 몇 년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 파동이 보여주듯, 저급한 감성의 형태인 각종 혐오주의들로 계속해서 표출되고 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이런 흐름을 정치 세력화하는 데 성공한 집단이나 인물은 없으며, 기득권층도 현재는 이와 거리를 두는 듯하다.
하지만 우리 기득권층 특유의 부도덕성에다 색깔론과 같은 구습의 존재까지 고려한다면 방심은 금물이다. 특히 의회민주주의의 전통이 깊고 그 뼈대가 굵은 서유럽과 미국도 막지 못했던 정치세력의 대두를 우리는 짧은 민주주의의 경험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그것도 지난 9년간 무너져 온 그 틀을 다시 재건하면서 말이다.
노경덕 광주과학기술원 교수ㆍ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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