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 주체 사진 모두 여성
부정적 행위 삽화엔 남성 묘사
“고개숙인 미혼모… 앞치마 엄마
학생들에 편향적 인식 심어줘
교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
“제가 치마를 싫어해서 단 한번도 학교에 치마를 입고 온 적이 없는데 미술 시간에 아이들에게 선생님을 그려보라고 하니 치마 입은 제 모습을 그린 거에요. 가만 생각해보니 초등 교과서에 나오는 여성 교사가 모두 치마를 입고 있더라고요. 무의식 속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섭구나 느낀 거죠.”(서울 숭인초등학교 교사 최정순씨)
초등학교 입학 이후 12년 동안 교과서를 매개로 세상을 배우는 학생들은 지문과 삽화에 스며있는 세계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교과서는 기존 고정관념을 확대 재생산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뜯어 보고자 현직 교사들이 머리를 모았다. 8일 서울시교육청에서 열린 성 인권 교사 직무연수 ‘학교와 성인지적 관점의 만남’에 참여한 교사 30여명은 조별로 둘러 앉아 교과서의 성차별적 요소를 하나 하나씩 짚었다.
분석 결과 사회 과목 교과서에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 교과서를 살펴본 서울 장충고 교사 오형민씨는 “기계가 맷돌에서 믹서기로, 가마솥에서 전기밥솥으로 변하는 등 과거와 현재의 가사노동 변화를 보여주는 사진 8개의 노동 주체는 모두 여성”이라고 꼬집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시 ‘돌매미’ 삽화에는 남학생이 잠자리채를 들고 손가락으로 매미를 가리키고 있는 반면, 여학생은 옆에 서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수동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남학생을 무조건 부정적 행위의 주체로 묘사하는 것 역시 성 고정관념을 고착화시킨다는 비판도 있었다. 중학교 도덕 교과서를 분석한 서울 전농초등학교 교사 이모씨는 “게임이나 야한 동영상에 중독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학생은 두 페이지에 걸친 삽화에서 모두 남학생으로 묘사됐다”고 설명했다.
교과서가 조장하는 고정관념에 대한 지적은 올 6월에도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설규주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팀에 의뢰해 초ㆍ중등학교 교과서 90종을 분석한 뒤, 교과서 내 남녀 이미지가 불균형하고 차별적이라고 공개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10대 미혼부모에 대한 복지서비스를 설명하기 위해 중학교 기술가정 교과서에 들어간 삽화가 대표적이다. 배가 부른 여학생 혼자 고개를 숙이고 힘 없이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있는 그림이다. 퇴근하는 남편을 앞치마를 멘 채 마중하는 아내를 묘사한 삽화도 당시 문제로 지적됐다. 전진현 신반포중학교 교사는 해당 삽화들에 대해 “미혼모에 대한 부정적이고 동정적 관점을 강화하고, 여성 혼자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고 비판했다.
교과서가 이처럼 일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만큼, 교과서를 활용해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서울 장충고등학교 한문 교사인 오형민씨는 “한문으로 쓰인 고전작품의 작자가 대부분 남성이고, 내용 역시 성차별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도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로 가르칠지, 아니면 주체적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여성으로 가르칠지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려 있는 만큼 교사 인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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