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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시민 믿었고, 시민은 법을 지켰다

입력
2016.11.1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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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와대 인근 광화문 앞 율곡로 집회 허용

경찰-시위대 큰 충돌 없어

집회 제한하는 근거 법률인 “집시법 12조 개정” 힘 실려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12일 저녁 청와대 앞 종로구 내자동 로타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12일 저녁 청와대 앞 종로구 내자동 로타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법원의 판단은 옳았다. ‘집회 허용은 민주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며 청와대 인근 행진을 허락한 법원의 결정에 우리 국민은 민주국가의 일원임을 12일 행동으로 입증했다. 교통 혼잡을 내세워 2주 연속 청와대 인근의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행진에 제동을 걸었던 경찰은 명분을 잃었다. 단지 청와대가 가깝다는 관성에 매여 집회의 자유를 옥죈 현행 법은 근본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12일 밤 박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의 외침은 광화문광장을 넘어 청와대에서 불과 800여m 떨어진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인근 내자동로터리까지 이어졌다. 시민들이 광화문 앞 차로(율곡로)를 점령한 것은 헌정 사상 처음이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경찰은 서울 도심 대부분을 행진 공간으로 내주면서도 율곡로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교통 소통을 위한 집회ㆍ시위 제한 요건을 명문화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집시법) 12조에 근거해 도심 동서를 연결하는 율곡로마저 막힐 경우 교통이 마비될 것이란 논리를 내세웠다.

속내는 달랐다. “경찰이 동원 가능한 인력은 최대 3만명”(이철성 경찰청장)인 상황에서 주요 길목을 미리 차단하지 않으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십만 명에게 저지선을 뚫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이전 몇몇 과격 집회를 떠올리며 우리 국민을 믿지 못하는 불신도 더했다.

반면 법원은 시민들을 믿었다. 이날 오전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부장 김정숙)는 집회 주최 측이 낸 경찰의 조건 통보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다. “기존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됐고 이번 역시 그간 보여준 성숙한 시민의식에 비춰볼 때 평화적 진행이 예상된다”는 이유였다. 실제 행진 마지노선인 내자동로터리에서는 분노의 함성만 드높았을 뿐 격렬한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다.

일부 시위대가 경찰과 몸싸움을 하다 23명이 연행되기도 했으나 ‘평화, 비폭력’의 외침 앞에 극단의 폭력은 사라졌다. 꼭 1년 전 이날 집회의 7분의 1도 안 되는 15만여명이 참여한 민중총궐기 대회 당시 광화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세종로 사거리에 차벽을 설치하고 행진을 전면 불허하다 격한 대치가 벌어져 455명이 폭력 시위 혐의로 사법처리 대상에 올랐던 것과 대비되는 장면이다.

경찰의 ‘집회 공포증’은 이전에도 번번이 법원의 퇴짜를 맞았다. 5일 2차 촛불집회 때도 아예 도심 행진을 금지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고, 불상사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올해 6월 열린 퀴어문화축제 거리행진도 경찰은 법원 뜻에 따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집회와 행진을 제한하는 경찰의 구시대적 관행은 여전히 헌법 가치보다 대통령의 권위를 우위에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13일 “대통령을 절대 존재로 떠받든 독재정권의 악습을 경찰이 답습하다 보니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ㆍ시위 자유조차 사회악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시민ㆍ사회단체들은 평화적 시위문화가 정착된 만큼 집시법 개정 운동에 본격 나설 예정이다. 박경신(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명박산성’을 쌓은 서울경찰청장이 고속 승진한 것처럼 경찰 입장에선 시위를 원천 차단하면 공로를 인정받는 분위기가 있다”며 “앞으로 집회신고에서 집시법 12조에 근거한 경찰의 금지통고가 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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