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深圳)의 한 카페. 한 여인이 들어온다. 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린다. 상대는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자의 기쁨과 설렘은 이내 걱정과 실망으로, 또 분노와 공포로, 절망으로 변해간다. 등장인물은 여주인공과 식당 종업원 둘뿐이고, ‘기다림’이라는 행위 외에는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상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울 삼청동 공근혜갤러리에서 12월 11일까지 개인전을 열고 있는 네덜란드 출신 사진작가 어윈 올라프의 영상작품 ‘웨이팅(Waiting)’의 내용이다. 올라프는 11일 기자간담회에서 “현대인들은 더 이상 기다림이라는 행위 자체에 시간과 감정을 쏟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마트폰도 한 가지 원인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잊혀진 행위’인 기다림을 경험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폐기종을 앓고 있는 작가는 병원에 앉아 진찰 결과를 기다리다 작품을 구상했다. “50분짜리 영상을 끝까지 볼 관객은 없을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 역시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불안, 초조를 겪으면서 온전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에 익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기다림’이라는 행위에 내재한 인간의 복합적 감정을 더욱 극대화해 보여주고자 그는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한 인물 사진 5컷과 함께 2점의 영상 작업을 병행했다. 작품은 최근 네덜란드 아르헨 국립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이 결정됐다.
4년 전 한국 첫 개인전 이후 발표한 ‘베를린’ 시리즈도 전시에 포함됐다. 스페인의 한 공항에서 부모가 자녀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어린 아이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고 상상한 것이 시작이다. 화면 속 세계를 지배하는 냉혹한 표정과 단정한 차림의 어린 아이, 그와 상반된 모습의 어른.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은 베를린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와 현재의 충돌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베를린 시리즈에 숨겨놓은 메시지를 찾는 것도 전시의 재미를 더한다. 폐기종 때문에 계단 오르기가 힘든 그에게 베를린에 동행했던 스태프들은 “한 칸만 더”라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덕분에 오를 수 있었던 세 개의 계단은 그에게 그 이상의 의미였다. 작가는 베를린 시리즈에 모두 계단을 등장시켜 그런 희망을 이야기한다.
완벽에 가까운 구도와 테크닉, 그 안에 더 세밀하게 계산된 상황 연출은 올라프의 사진을 회화에 빗대 이야기하게 만든다. 제한된 빛을 사용하고 표면 처리를 매끄럽게 해 극대화된 명암 효과가 자아내는 몽환적인 분위기도 이런 비유에 한 몫을 한다. 올라프는 ‘이미지의 신’이라 불리지만 상업 사진작가로도 활약했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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