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등 우리 기업 베트남 외국인투자 주도
중소 제조업체들도 베트남으로 우르르
임금 상승 등 불안요인도 서서히 고개
베트남의 ‘약발’은 언제까지 유효한가
지난달 24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의 관문 노이바이국제공항에 도착하자 큼직한 옥외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2년 전에는 없던 신한은행의 광고판입니다. 1995년 호찌민지점을 설립하며 베트남에 진출한 신한은행은 20년 만에 외국계 은행 1위에 등극했습니다.
삼성전자 휴대폰과 LG전자 TV 광고판도 요지 중의 요지인 공항 앞에 설치돼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회간접자본(SOC)에는 일본 자금이 투입돼 이전까지 광고판 역시 일본 기업들의 독차지였습니다. 국내 기업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하노이의 한 교민은 “한국 기업들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 배턴 넘겨 받은 ‘세계의 공장’ 베트남
한국은 최근 5년간 베트남 최대 투자국으로 발돋움했습니다. 베트남 국내총생산(GDP)의 20%를 책임지는 삼성전자를 필두로 내로라하는 국내 기업들이 베트남 수출과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죠.
베트남 투자청이 집계한 2011년~올해 6월까지 한국 기업들의 누적 투자는 5,212건에, 총 투자금액은 485억 달러(약 55조7,000억원)에 이릅니다. 투자 건수나 금액에서 일본 싱가포르 대만을 압도했고,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하는 중국은 베트남과 원체 사이가 좋지 않아 상위권에 없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번째 수출 대상국이고, 수입국 중에서는 8위입니다. 2014년 12월 타결된 한-베트남 자유무역협정(FTA)이 지난해 12월 20일 발효돼 양국 간 거리는 더욱 좁혀졌습니다.
베트남에서 삼성의 위상과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삼성전자가 베트남에 둥지를 틀며 삼성SDI, 삼성디스플레이 등 계열사들이 일제히 진출했고, 협력업체 수백 개가 따라가며 하노이 북부 박닌성과 타이응엔성의 삼성 공장 일대는 ‘삼성 타운’처럼 변모했습니다.
베트남 정부도 삼성을 귀히 여겨 땅을 무상 임대했고, 올해 기준 세율이 20%나 되는 법인세도 한시적으로 면제하는 특별한 혜택을 제공했습니다. 수년 간 공사 중인 하노이에서 동부 하이퐁까지 연결하는 동서간 고속도로를 제쳐두고, 공항과 타이응웬의 삼성전자 2공장을 잇는 도로를 먼저 완공했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삼성은 베트남 최대의 외국인직접투자(FDI) 기업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다른 동남아 국가에 없는 베트남의 매력
베트남이 글로벌 기업들의 제조업 기지로 부상한 것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첫손에 꼽는 건 우수한 노동력이죠.
베트남 인구는 9,300만여명입니다. 아세안 지역에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다음으로 인구가 많고, 게다가 젊은층의 비중이 높습니다. 2014년 기준 10~24세 인구가 40%에 달한다고 합니다. 평균연령은 29세 정도니 정말 젊습니다.
결혼을 일찍 하고 자녀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오래 전쟁을 치르며 워낙 많이 죽어 장년과 노년층 숫자가 적은 게 젊은이가 많은 이유라는 해석도 내놓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의 교육수준이 높고 책임감이 강한데다, 임금도 아직까지 중국의 절반 수준이니 제조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대박입니다. (공식적으로 확인한 건 아니지만 삼성전자 생산직 근로자의 현지 임금이 월 350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하나 같이 “이곳 노동력은 최고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刷新) 정책’을 채택해 적극적으로 대외개방을 추진, 외투기업의 투자환경도 좋습니다.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총괄하는 도 녓 황 베트남 투자청장도 본지 인터뷰에서 “베트남 투자 정책과 사업 여건은 외국인에게도 평등하고 투명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인 베트남은 중국처럼 모든 토지가 국가 소유입니다. 외투기업들은 50년간 토지를 임대하는 거죠. 다만 현지 기업과 50대 50대 합작이 아닌 100% 투자하는 단독법인 설립이 가능하다는 게 중국과 다릅니다.
현지 기업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입니다. 삼성전자, LG전자를 비롯한 제조업은 물론이고, 금융업도 단독법인이 가능합니다. 신한은행에 이어 최근 우리은행도 법인 설립에 성공했습니다. 방송 서비스 같은 분야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독법인이 허용됩니다.
지리적인 여건도 베트남의 장점입니다. 베트남 면적은 한반도의 약 1.5배인데, 영토가 남북으로 가늘고 깁니다. 어디서든 동쪽으로 두어 시간만 달리면 바다가 나옵니다. 도로나 항만, 공항 등 기반시설은 다른 동남아국가들에 비해 잘 갖춰진 편입니다.
수출 기업들에 가까운 곳에 있는 항만은 매우 중요한 입지요인이죠. 개성공단 폐쇄 뒤 대체 부지를 찾던 우리 중소기업들이 베트남으로 달려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정치적으로 안정됐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올해 4월 열린 전당대회에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당서기가 연임을 했습니다. 당분간 친기업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을 거란 의미입니다.
베트남에 투영되는 중국의 잔상
베트남을 ‘포스트 차이나’라고 합니다. 베트남이 세계의 공장이었던 중국을 대체한 새로운 공장인 셈이죠. 우리 기업들만 놓고 보면 중국에 진출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입니다. 기업 규모를 막론하고 일제히 싼 인건비와 10억 인구의 내수시장이란 기대를 품고 우르르 중국으로 몰려갔습니다.
물론 초기에는 좋았지만 인건비가 빠르게 상승하고, 토지비용이 오르고, 모방으로 출발한 현지 기업들이 무섭게 성장하며 기회의 땅 중국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중국에 진출한 중소기업들의 야반도주가 빈번했던 게 2000년대 말이니 단물을 빤 건 채 20년이 되지 않을 듯 합니다.
요 몇 년간 불붙은 우리 기업들의 ‘베트남 러시’도 언젠가는 한계상황에 도달할 겁니다. 베트남도 인건비가 오르고, 토지 비용이 상승하는 것을 현지에 진출한 기업들은 조금씩 피부로 느끼고 있으니까요.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 등에 따르면 올해 베트남의 지역별 월 최저임금은 최소 107.53달러에서 많게는 156.81달러입니다. 중국(308달러) 태국(252달러) 인도네시아(232달러)보다는 낮지만 매년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상승률은 10%가 넘었고, 올해는 그나마 7.3%라고 합니다.
개인소득세 이외에 근로자와 기업이 분담하는 사회보험료도 인건비 상승 요인입니다. 기존 사회보험료 산정 기준은 기본급인데, 2018년부터는 기본급에 수당을 포함한 금액으로 기준이 바뀝니다. 현재 기본급의 약 22%를 사회보험료로 내는 기업들의 부담액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죠. 여기에 토지 사용료도 최근 10년간 3배 정도 올랐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소규모 현지 업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국내 유명제품을 본뜬 저가 짝퉁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토바이 헬멧 세계 1위 홍진HJC가 혼다의 의뢰를 받아 생산한 헬멧의 경우 벌써 7개 업체가 짝퉁을 만들었고, 심지어 로고까지 도용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신규 개발 헬멧을 현지에 의장등록 한 HJC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지적재산권 보호가 완전치 않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인적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중국의 ‘꽌시(關係)’와 비슷한 ‘꽌해’도 베트남 투자의 위험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생산시설을 건립한 토지의 임대기간(50년)이 끝난 뒤 재임대가 가능할 지도 미지수입니다. 관련 법령이 미비하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베트남의 토지를 50년간 써 본 외투기업이 없어 선례도 없습니다.
‘기회의 땅’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일까
베트남 경제는 삼성전자가 투자를 결정한 2007년을 기준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2007년 이후 베트남은 본격적으로 중국을 대체할 글로벌 생산기지로 부상했습니다.
베트남 투자청의 통계를 보면 1988년 이후 올해 6월까지 누적된 외국인투자 중 가장 많은 업종은 제조ㆍ가공업입니다. 2만1,666건의 투자 중 절반이 넘는 1만1,493건(53%), 금액으로 따지면 전체 2,934억 달러 중 1,716억 달러(58%)가 제조ㆍ가공업으로 쏠렸습니다.
우리 기업들의 제조ㆍ가공업 투자 비중은 전체 평균보다 더 높습니다. 1988년부터 올해 6월까지 누적 투자 5,364건 가운데 3,188건(59.4%), 전체 투자금액 485억 달러 중에선 334억 달러(68.8%)나 됩니다.
FTA 발효 이후인 올해 1월부터 8월까지만 놓고 보면 제조ㆍ가공업은 789건의 투자 중 457건(57.9%)으로 건수 자체는 평균 이하입니다. 하지만 투자금액은 48억 달러 가운데 40억 달러가 넘습니다. 투자금의 무려 84%가 제조ㆍ가공업에 집중된 것이죠.
우리 기업들이 베트남을 글로벌 제조기지로 키운 주역인 셈입니다.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베트남도 한도에 이르면 제3의 국가가 제조기지의 역할을 이어받겠지만 아직은 기업들이 베트남에 기대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베트남 투자의 전성기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임충현 대한상공회의소 베트남사무소장은 “보수적으로는 5년, 적어도 10년은 이대로 갈 것이란 의견들이 많다”며 “한계상황은 오겠지만, 업종 별로 차이가 있어 섬유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은 보다 빨리 그런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업종 이외에 기업 규모에 따라서도 차이가 갈릴 것이란 분석도 적지 않습니다. 박병국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하노이무역관 부관장은 “꽌해가 존재하는 것처럼 아직 투명화가 안됐다는 게 기업에는 어려움이 될 수 있다”며 “대규모로 투자를 하고 협상력이 있는 대기업보다는 인건비에 초점을 맞춘 중소기업들에 위협 요소가 많아질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이제는 수출용 상품을 만드는 제조기지보다 1억에 가까운 내수시장을 파고 들 때라는 견해도 적지 않습니다. 베트남에서 근무 중인 싱가포르 공기업 VISP의 한국인 직원 박병현 과장은 “다른 국가들의 경제발전 과정을 보면 의식주가 충족된 이후 환경과 안전 관련 업종이 뜨고, 오토바이 수요가 자동차로 이동하는데 베트남도 그런 임계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내다봤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종합하면 베트남에 일찍 진출한 기업들은 확실히 기회를 잡았고, 아직도 약발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건비 따먹기’ 식 단순 제조ㆍ가공업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분석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어디든 선발 주자는 벌면 많이 벌고 잃어도 적게 잃지만, 후발 주자는 적게 따고 잃을 땐 왕창 잃는 법입니다. 베트남에서도 ‘입구’ 못지 않게 ‘출구’를 꼼꼼히 살펴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노이=글ㆍ사진 김창훈 기자 ch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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