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땅 매도 특혜 의혹, 처가 땅 차명 보유 의혹, 의경 아들 특혜 보직 의혹, 가족 회사 횡령 의혹, 허위 공직자재산신고 의혹… 의혹이 꼬리를 문다. 여기까지는 개인 비리 의혹이라면, 최순실 국정 농단을 알고도 묵인했다는 직무유기 의혹은 단연 핵심이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의혹이다.
대통령 친인척 및 측근 관리, 공직기강 확립을 핵심 업무로 하는 민정수석실의 지휘자는 정작 자신이 의혹의 당사자가 되자 모든 의혹을 철저히 부정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철저한 비호 속에 그는 국회의 국정감사 출석까지 거부했다.
그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만천하에 드러나 대통령이 실권을 잃은 뒤에야 검찰에 뻣뻣한 모습을 드러냈다. 실망과 분노로 가득 찬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의 눈빛과 태도는 교만했다. 그의 이런 모습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가야 할 길이라고 판단하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
우 전 수석은 경북 영주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만 20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검사 2등으로 마치고 서울중앙지검에서 화려하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초임검사 시절 대구지검 경주지청에서 근무하다 갑자기 창원지검 밀양지청으로 발령이 났다. 세계일보가 보도한 검찰 내부 인터뷰 자료에 따르면 우 전 수석은 이 시기를 검사시절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YS와 가까운 사람을 수사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밀양지청으로 발령 났고 이후 지방을 전전할 때 힘들었다”라며 “조직에 대한 배신감으로 ‘법원 갈 걸’ 하며 후회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승승장구하던 사내가 처음으로 마신 고배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 사건’ 수사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당시 수사진은 공소시효를 하루 앞두고 사건에 직접 관여한 에버랜드 전 현직 사장을 전격 기소해 공소시효를 정지시켰다.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이 우 전 수석으로 알려졌다.
그의 수사력은 검찰 내에서 정평이 나있다. ‘수사 하나만큼은 그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사건과 관련된 사적인 만남과 통화는 일체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로비가 통하지 않는 검사’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런 모습 때문에 뻣뻣하다는 의미의 ‘깁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엔 기업가 장인으로부터 상속받은 많은 재산이 바탕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상처로 기억하는 초임검사 시절의 경험 탓일까. 검찰의 상명하복 문화를 거스르면서까지 소신을 펼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직속상관’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가야 할 길이라고 판단하면 앞뒤 가리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실천한 것 아니었다. 수사과정에서 ‘윗선’의 뜻과 맞지 않으면 자신의 뜻을 굽혔다. 2003년 삼성 구조조정본부 압수수색 무마, 2005년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 불구속 기소 등이 그가 뜻을 굽힌 대표적인 사건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씨, 당신은 더 이상 대통령도, 사법고시 선배님도 아닌 그저 뇌물수수 혐의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2009년 4월 30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과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직접 조사했다. 노 전 대통령의 조사를 지켜봤던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회고록에 우 전 수석의 당시 말을 이렇게 적었다.
“노무현 씨, 당신은 더 이상 대통령도, 사법고시 선배님도 아닌 그저 뇌물수수 혐의자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노 전 대통령은 약 3주 뒤인 5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파로 임채진 당시 검찰총장은 물러났다. 우 전 수석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 수사기획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계속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검사 생활은 거기까지였다. 검사장 승진에 두 차례 실패하며 2013년 4월 사표를 던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참여가 결격 사유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나치게 많은 재산이 걸림돌이었다는 추측도 있다.
“승진은 다른 놈 시켜주고”
2014년 5월 그는 화려하게 돌아왔다. 정권 2년 차를 맞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으로 발탁된 우 전 수석은 ‘정윤회 문건’ 청와대 유출 사건 당시 이를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처리하며 ‘리틀 김기춘’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8개월 만인 2015년 1월 민정수석 자리를 꿰찼다. 파격인사였다. 사법시험 29회 출신인 우 전 수석은 23회인 황교안 당시 법무장관, 24회인 김진태 당시 검찰총장과 비교하면 까마득한 후배였다. 우 전 수석의 전임 민정수석이자 김영한(24회) 전 수석과도 큰 차이가 났다.
신동아에 따르면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지난해 4월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우 전 수석은 “일만 있으면 저를 불러서 부려먹고는 승진은 다른 놈 다 시켜주고” 라며 검사장 승진에서 밀린 것을 억울해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검찰총장 권력이 자기 거냐. 대통령이 ‘거기 잠시 앉아 있어라’ 이런 거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검찰조직에 대한 우 전 수석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또 이 자리서 검찰 내 ‘우병우 사단’에 관한 질문에 “(검사 생활) 20년 넘게 했는데 없으면…”이라며 검찰 조직 통제에 대한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사정 기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중앙지검 3차장, 특수1부장, 국정원 2차장까지 모두 그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이들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황제 소환, 늦장 수사… 검찰은 언제까지 그를 우대할까
지난 7월 그를 향한 의혹이 터졌다. 조선일보가 우 전 수석 처가의 부동산 매매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이 쏟아졌다. 그리고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수사 보고를 받는 민정수석이 수사대상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모순적인 상황에 야권은 사퇴를 촉구했다. ‘청와대 실세’는 흔들리지 않고 버텼다.
검찰은 그를 향한 의혹이 불거진 후 석 달 만인 이달 6일에야 그를 불러 조사했다. 그의 이름 뒤에 민정수석이라는 직함이 떨어져 나간 후였다.
검찰은 그가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부터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알고도 덮었다는 직무유기 혐의에 대한 수사도 마지못해 시작했다. 그에 대한 압수수색은 10일에 진행했다. 특별수사팀(팀장 윤갑근 고검장)이 수사에 착수한 지 무려 79일 만이다. 역시 팔짱 낀 그의 사진이 국민의 공분을 일으킨 후였다.
‘수사의 귀재’였던 그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볼까. 조사 과정서 후배 검사를 앞에 두고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모습은 그가 자신을 수사하는 검찰을 바라보는 그의 솔직한 시선이 아닐까.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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