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역과 의역 어떤 게 나을까
유명 해외 문학 번역가 김남주
프랑스 아를 번역자회관서
문학으로 엮인 이들과 대화 나눠
사라지는 번역자들
김남주 지음
마음산책 발행ㆍ232쪽ㆍ1만4,000원
책 많이 보는 사람들이 책을 고르는 기준에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믿고 보는 저자의 저서, 둘째 믿고 보는 저자가 추천하거나 책 속에 인용한 저서, 셋째 출판사, 넷째 번역자의 신망. 때때로 시의성. 취향 따라 기준을 두는 비중 차이는 있지만 대개 이 포위망에서 크게 벗어나긴 어렵다.
‘오후 네 시’를 통해 아멜리 노통브를, ‘나를 보내지 마’로 가즈오 이시구로를 소개한 번역가 김남주는 애서가들에게 든든한 해외 문학의 지도 같은 글쟁이다. 작품 행간의 여백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이 탁월한 전업 번역가는 2013년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 이후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됐다.
30년간 프랑스와 영미 문학을 우리말로 옮긴 저자의 화두는 역시 번역에 관한 것. “번역된 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과연 ‘번역 같지 않은 번역’일까”란 질문으로 신간 서두를 시작한 저자는 ‘번역의 공동체’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프랑스 출신의 번역가) 조르주 무냉은 번역은 ‘유리가 있다는 것을 즉각 알 수 있는 직역’(채색 유리)과 ‘유리가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완전히 투명해진 의역’(투명 유리)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좋은 번역의 기준은 번역자마다 다르지만 채색 유리든 투명 유리든 텍스트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에서, 어떤 번역자든 유리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번역자는 어떻게 사라져야 옳은가.
파리에서 기차로 네 시간여 달리면 닿는 남프랑스 작은 도시 ‘아를’, 그곳 반 고흐 광장 건물 한편에는 번역자회관이 있다. 세계 각국의 번역자들이 일정 기간 묵으며 작업하고 의견을 나누는 ‘실존하는 번역 공동체’다. 저자는 한동안 이곳에 살며 로맹 가리를 닮은 이란 남자 바스나,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리나’에서 튀어나온 듯한 러시아 여자 타티아나, 아침에는 커피, 점심에는 맥주, 저녁에는 포도주를 마시며 다른 번역자들의 밥을 빌붙어 먹는 그레고르 등을 만난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문학이라는 신비롭고 기이한 제도”(자크 데리다) 속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 사이의 빈 공간. 스페인 남자 후안과 눌은밥을 먹으며 의역과 직역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저자는 “먼저 해석하고 다음에 번역한다”는 움베르코 에코의 어록을 빌려 “의미와 표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없는 경우 의미가 우선한다”고 결론 내린다.
생트마리드라메르 해변에서 작열하는 태양에 맞서며 나눈 ‘번역 공동체’들과의 대화도 번역과 문장, 어원에 관한 이야기로 수렴된다. “중세 때에는 지금의 번역에 해당하는 ‘translation’이라는 단어가 성자의 유물을 한 성지에서 다른 성지로 옮기는 걸 의미했다고 해. (…)어원적으로 파악하자면 번역은 원전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야 하는 거야. 거기 묻은 땀냄새나 핏자국까지 말이란 일종의 대안 기호였던 셈이지. 어떤 경우든 간단한 일이 아니야. 그가 말하는 언어 내의 번역, 언어 간의 번역 그리고 기호 간의 번역 모두 형식 안에 담겨 있으면서 형식을 넘어서니까.”
번역자는 “단락에서, 행간에서, 역사의 갈피에서 그리고 지상에서” 사라지지만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존재”다. 이국어에 담긴 문화와 정체성을 환기하며 자신의 언어에서 올바르다고 믿는 단어를 선택하는 한 번역자는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책 곳곳에 펼쳐지는 “자신이 경도된 저자를 말하는 행복한 번역자”들을 만나는 장면은 단연 이 책의 백미다. 하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 장 그르니에와 카뮈의 소설, 카미유 클로델의 삶을 두고 벌이는 우아한 언어의 성찬은, ‘삶의 배수진’을 치게 하는 전업 번역가의 현실을 견디게 한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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