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ㆍ이윤 옮김
필로소픽 발행ㆍ96쪽ㆍ9,000원
철면피, 관심종자, 쇼맨, 허풍쟁이, 차별주의자…. 제 45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그가 대선 기간 동안 쏟아낸 막말은 역대 대통령들의 실언을 전부 합쳐도 상대가 안 될 수준이다. 2015년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그는 “위대한 미국”을 만들겠다며 멕시코 이민자들을 미국으로 마약과 범죄를 가져오는 “성폭행범”들로 지칭했다. 이후 “2001년 9.11 테러 때 많은 미국 내 아랍인들이 환호했다”는 근거 없는 발언을 했고, 트위터에서는 “살해된 백인들 중 81%가 흑인에게 당했다”는 한 히틀러 추종자의 가짜 통계를 리트윗 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궁금한 것은 트럼프가 저 말을 하고 저 게시물을 리트윗 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다. 이미 당선된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주로 이민 가는 방편이 마련되지 않은 지금 저 궁금증에 답하는 건 괜찮은 소일거리가 될 수 있다. 해리 G. 프랭크퍼트 프린스턴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저서 ‘개소리에 대하여’에 따르면 트럼프의 언행은 거짓말도, 막말도, 실언도 아닌 개소리로 분류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개소리의 화신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에서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해 일말의 단초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소리에 대하여’는 프랭크퍼트가 2005년에 쓴 논문 한 편 분량의 짧은 책이다. 이번 미국 대선 기간 동안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트럼프의 막말을 분석하는 기사에 여러 차례 인용되기도 했다.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인 저자가 다소 점잖지 못한 주제에 천착한 이유는 지금까지 이 개소리의 개념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문.(원제는 ‘On Bullshit’으로 역자는 ‘Bullshit’을 ‘개소리’로 번역했다.) 그럼 개소리와 거짓말, 막말, 헛소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독립기념일 연설을 예로 든다. 통상 연설자들이 “건국의 아버지들이 신의 가호 아래 인류를 위해 새로운 기원을 창조했던 우리의 위대하고 축복 받은 조국”이라고 말했을 때 여기에 거짓은 없다. 막말도 물론 아니다. 저 말에 창궐하는 것은 무관심이다. “우리의 조국이 정말로 위대한지, 실제로 축복을 받았는지, 건국의 아버지들이 진짜로 신의 가호를 받았는지”에 화자는 관심이 없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개소리와 거짓말은 명확하게 갈린다. 거짓말쟁이가 우리를 진실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꾀하는 반면 개소리쟁이는 진리는 물론이고 진리의 왜곡에도 관심이 없다. 거짓말쟁이는 최소한 진리와 거짓에 대해 신념을 가진 반면, 개소리쟁이에겐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 “정직한 사람의 눈과 거짓말쟁이의 눈은 사실을 향해 있지만, 개소리쟁이는 사실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개소리를 들키지 않고 잘 헤쳐 나가는 데 있어 사실들이 그의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한, 그는 자신이 말하는 내용들이 현실을 올바르게 묘사하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목적에 맞도록 그 소재들을 선택하거나 가공해낼 뿐이다.”
눈치 챘겠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소리쟁이와 거짓말쟁이의 면밀한 구분이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진리의 권위다. 거짓말쟁이와 참말쟁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리의 권위에 복종하며 일련의 사회적 풍경들을 함께 만들어온 것과 달리, 개소리쟁이는 그 울타리의 바깥에 있다. 저자는 ‘개소리의 확산’이란 현상을 파고 들어가면 그 아래 “회의주의”가 있다고 말한다.
“회의주의는 우리가 객관적 실재에 접근할 수 있는 어떤 신뢰할 만한 방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태의 진상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가능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반실재론적’ 신조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무너트리고, 심지어 객관적 탐구라는 개념이 이해 가능한 개념이라는 믿음을 약화시킨다.”
진리와 신념의 붕괴는 근대적 인간의 종말과 연관이 있다. 인간과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할 것이란 푸르디 푸른 믿음은,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자들의 승리 앞에서 그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됐다. 트럼프는 ‘백인 기독교인’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자들에게 지속적인 기득권을 약속함으로써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세계야 어찌되든 우리라도 잘 살자”는 더 이상 위악 어린 개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시대정신이 됐다.
저자는 근대적 믿음이 쇠퇴한 결과로 “정확성이라는 이념”이 “진정성이라는 대안적 이념”으로 후퇴했다고 말한다. 진리를 찾는 것이 무의미해지면서 자기 자신에게나 충실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지지자들의 공포에는 확실히 진정성이 있다. 근래 이 나라에 분 페미니즘 열풍에 대해 일부 남성이 표출한 공포가 백 퍼센트의 진정성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어떤 것에 확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오류로 드러났다고 가정하면서도, 우리 자신만은 확정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일갈한다. “의식적 존재로서 우리는 오직 다른 것들에 반응하면서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진실을 떠나 본성에 안착하며, 빠르게 후퇴하는 세계를 향해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황수현기자 sooh@han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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