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깔끔하고 멋들어진 수트는 배우 유지태(40)의 트레이드 마크다. 그 어떤 역경에 부딪혀도 반듯한 차림새는 무너지지 않았다. 부정부패와 불륜 등으로 치욕적이었던 검사 이태준(tvN ‘굿 와이프’), 갑상선 암으로 수술을 받다 목소리를 잃은 세계적인 테너 배재철(영화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거대 언론사 사주의 동생으로 야망이 앞섰던 앵커 김문호(KBS ‘힐러’)에서 보듯 유지태는 고매한 자태를 이어갔다. 10일 개봉한 영화 ‘스플릿’에선 무언가 달라졌다. 근사한 수트 차림은 사라지고 늘어진 티셔츠와 주머니가 양 옆에 달린 일명 ‘건빵바지’로 단벌신사가 됐다.
역할도 확 바뀌었다. 볼링 국가대표 선수로 승승장구 했다가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저는 철종 역이다. 사고로 임신한 아내까지 잃고 허송세월을 보내다 도박 볼링으로 전전하는 생활도 한다. 그간 유지태가 보여주던 고고한 자세는 온데간데 없다.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헝클어진 머리와 거친 입담은 그간 유지태를 떠올린 관객이라면 어리둥절할 지도 모르겠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유지태도 이러한 변신을 인정했다. 그는 “수트만 입다가 생각보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철종에 다가가기가 쉽지는 않았다”고 했다. 잘하는 연기를 하고 싶은 게 배우들이고, 또 영화사나 제작사 측에서도 영화의 흥행 여부를 생각해 180도 달라지는 배우의 도전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어서다. 하지만 유지태는 “이번 영화는 꼭 해야 했다”고 말한다. 한국영화계에 꼭 필요한 영화이기 때문이란다.

“‘스플릿’은 순예산은 30억원, 총예산은 50억원 정도의 규모입니다. 중∙저예산 영화라고 볼 수 있지요. 요즘 상업영화들처럼 중∙저예산 영화도 자금의 회수 목적이 강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상업영화보다는 소재의 자유로움이 훨씬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감독의 결을 더 담을 수 있고요. 이러한 영화들이 많아져야 한국 영화계가 저변이 더 넓어지고 희망적이기 않을까 싶어요.”
배우이기에 앞서 감독으로도 몇 편의 영화를 연출한 유지태로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배우보다 감독으로 느꼈을 영화계의 현실이 더 뼈 아파서일 것이다. 저예산 장편영화 ‘마이 라띠마’(2012)를 비롯해 단편영화 ‘자전거 소년’(2003)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2005) 등을 연출하며 꾸준히 감독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마이 라띠마’는 스크린 30여개만 확보한 채 관객이 1만명도 들지 않은 채 초라하게 영화관을 내려와야 했다. “스크린 독과점의 피해작”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러니 유지태는 영화 한 편이 제작돼 개봉하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고된 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몇 편의 단편 영화를 연출하다 첫 장편으로 ‘스플릿’의 메가폰을 잡은 최국희 감독의 심정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유지태는 “감독이 얼마나 외로운 지를 (‘스플릿’을 찍으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며 “최 감독이 각본, 연출을 모두 했는데 쉬운 게 아니다. 정말 외로운 싸움”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단편 영화 외에 장편에서 인정 받지 못했던 최 감독이 “30억, 50억을 받는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큰 재능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래서 그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되려고 했고, 감독과 배우 간에 소통이 필요할 때는 중간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술자리가 특히 그랬다. 소주 1병 정도의 주량이지만 최 감독과 스태프들 간의 “앙상블을 만드는 데” 뒤풀이도 주도해야 했다고. 그래도 “다행히 최 감독이 권위를 세우지 않고 배우나 스태프 등과 소통하려고 부단히 노력을 기울이더라”고 은근히 최 감독에 대한 신뢰도 내비쳤다.

연기적으로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포지션을 유지해야 했다. 정상의 자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까지 잃고, 한 쪽 다리를 절며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도 모자라 동료의 배신을 알고 정신적인 고통에 휩싸이는, 복합적인 내면을 풀어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볼링에 있어서도 전문가로 보일 정도로 완벽한 폼과 구질을 보여야 했다.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어야”한다는 일념으로 볼링에 4~5개월을 투자했다. 볼링 자세부터 하나하나 고쳐갔다. 공을 들고, 레인을 걷고, 공을 굴린 후 돌아서는 자세까지 꼼꼼히 배워갔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볼링 평균점수가 180점까지 됐다. “프로볼러에 도전하고 싶었”다고. 그러나 영화 촬영 등 여러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뒀단다. 그만큼 볼링과 한 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얘기일 터.
지적장애와 자폐를 안고 있는 볼링천재 영훈(이다윗)과 한 팀을 이뤄 도박 볼링을 하는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볼링 핀이 전부 쓰러지며 스트라이크를 기록할 때마다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주다가도 두 사람이 지닌 상처를 보고 있자면 짠한 연민이 밀려온다. 볼링 연습을 꾸준히 해온 유지태와 이다윗의 ‘케미’가 한껏 돋보인 대목이다.

“이번 영화는 40회차 안으로 촬영했어요. 장편 영화의 반 정도 수준이지요. 그러다 보니 리얼리티를 끌어내서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연기가 쉽지 않았어요. 특히 최 감독이 컷 사인을 늦게 하는 성격이라 어느 정도까지 쓰일지 몰라 애드리브도 많이 했죠. 혼났죠 뭐. 하하”
말은 그렇게 해도 감독 스타일을 존중하는 건 당연하단다. “‘올드보이’(2003)를 때 박찬욱 감독은 연기다운 연기를 원했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때 홍상수 감독은 극의 리얼리티를 따르게 하지만 자신을 모방하길 바라는, 일기 속 주인공이 되어주길 바랐죠. 감독들이 원하는 게 다르기 때문에 배우들이 프로답게 그 한계를 뛰어넘는 건 언제나 힘든 것 같아요.”
충무로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배우에게나 기댈 수 있는 요구사항 아닐까. 1998년 영화 ‘바이 준’ 이후 ‘주유소 습격사건’ ‘동감’ ‘가위’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심야의 FM’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꾸준히 영화계를 지켜온 그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쑥스럽지만 성실한 배우라는 소문이 있어서인지 이런 (어려운)역할의 시나리오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 같아요. 또 자주 들어오기도 하고요(웃음). 하지만 저도 흠이 많고 ‘허당기’가 충만한 사람이거든요. 얼마 전 KBS2 ‘해피선데이-1박2일’에 출연해 허당기 많은 제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죠. 길거리를 가면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1박2일’ 효과가 대단하다는 생각뿐입니다.”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