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침을 열며] ‘현실’ 리버럴리즘의 종언

입력
2016.11.10 16:10
0 0

8일(현지시간) 치러진 미국 대선에서 여론조사의 예측과 그 예측을 믿고 싶어 했던 많은 사람의 설마 하는 마음을 짓밟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었다. 득표수는 힐러리 클린턴이 근소하게 많다고 하나, 경합주 대부분에서 승리를 차지하면서 선거인단 수에서 크게 앞선 것이다.

클린턴의 가장 큰 패배 원인으로는 러스트벨트라 불리는 동부의 쇠락한 공업지역 전체를 트럼프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이 지목되고 있다. 그동안 트럼프가 자신하며 떠버리던 ‘숨은 백인표’, 즉 사회적으로 몰락하는 백인 중하층과 노동자들이 클린턴으로 대표되는 리버럴 정치권이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기는커녕 금융자본주의 기득권층과 공생관계에 있다고 판단해서, 일부는 차라리 또 다른 일부는 기꺼이, 여성혐오와 이민자 차별, 백인우월주의 성향에 막말을 일삼는 트럼프를 지지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시위 역시 이미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쉽게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과연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는지는 최순실 정국에 빠진 한국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화두가 될 전망이다.

사실 분노하고 좌절한 대중들이 세계화나 사회적 진보에 그 책임을 물으면서, 합리적인 판단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보이는 정치적 결정을 내린 사건이 올 들어서만 해도 미국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여름 영국에서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유럽연합의 잔류냐 탈퇴를 결정하는 국민투표에서 브렉시트, 즉 탈퇴가 결정되었다. 브렉시트와 트럼프의 당선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우선 위험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설마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렇고, 기성 정치ㆍ경제 질서뿐 아니라 문화권력에서 자신들이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백인 남성들이나 노동자들의 분노를 빼고 선거결과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 대부분이 깊은 좌절과 충격을 느끼는 가운데서, 일부 근본적인 변혁을 도모한다고 내세우는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가운데 이런 결과가 어쨌든 기성의 질서를 뒤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잘된 것이라 반기는 이가 꽤 된다는 것 역시 공통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연 트럼프의 집권을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해도 좋은 일일까. 한국에서도 스스로 진보적이라 자임했던 정치인들 가운데 일부가 이미 트럼프의 집권은 아웃사이더의 승리이며 기성 질서에 대한 심판이라는 논평을 내기도 했다. 물론 그런 면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선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특정 연령대나 계층의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처럼 무용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이후 실제로 혐오범죄가 많이 증가했다는 통계 결과에서 보듯이, 공론장에서 혐오발언을 용인하고 민주적 절차에 대한 존중을 폐기하는 행위는 실제 사회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치적 분석이나 거시적 안목으로만 접근하기에는 당장 삶에 위협을 받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세계적으로 목도하고 있는 것은 ‘현실’ 리버럴리즘의 종언이다. 리버럴리즘이 지금까지 무엇을 약속하고 어떤 언설을 내세워 왔든 간에 이제 현실 속에서 심화하고 있는 갈등과 격차를 인정하고 그 고통을 돌아보지 않는 허울뿐인 자유와 평등의 논리로는 선거에서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오래된 세계는 가고 새로운 세계는 오지 않은 이 갈림길에서 희망의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적어도 차별과 혐오에 근거한 파시스트적 선동도, 현실의 소외와 격차를 논하지 않는 리버럴리즘도 그 답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