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두렵지만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겠다.”
유럽 좌파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미국 대선을 앞두고 이런 주장을 했던 것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지젝은 지난 4일 영국 뉴스 채널4 페이스북에 올라온 인터뷰 동영상에서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누구를 뽑겠느냐”는 질문에 “트럼프”라고 답했다. 지젝은 이어 “위험은 힐러리”라며 “그녀는 불가능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연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버니 샌더스가 힐러리를 응원(endorse)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때 트럼프가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나온 사람이 리만 브라더스를 응원하는 꼴이라고 했다”며 트럼프의 그 말에 “완전히 동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모든 사회에는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하는 암묵적인 룰들이 있다”며 “트럼프는 그런 룰들을 깨뜨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만일 트럼프가 이기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거대정당이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라며 “아마도 거기서부터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젝은 자신의 “절박한 바람”이라면서 “트럼프가 이긴다 해도 미국이 독재국가가 되지는 않을 것이고 트럼프는 파시즘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그의 승리는 아주 큰 깨어남을 가져와 새로운 정치 프로세스가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역시 “트럼프의 승리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그 대표 사례로 “백인 우월주의자들 문제”와 “대법관을 우파들로 임명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힐러리가 절대적인 관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두렵다”며 “그것이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지젝은 힐러리를 “은행들과도 연결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것처럼 꾸미고 사는 차가운 전사”라고 말했다.
엉뚱해 보이는 지젝의 이런 해법은 나치 정치 선동에 이론적 토대가 됐다고 오인 받는 철학자 하이데거 연구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젝은 하이데거를 다룬 2008년 저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에서 하이데거는 나치즘을 자본주의, 자유주의 폐해를 혁신하는 일종의 ‘사건’으로 보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건이 아니라 ‘유사사건’이라고 분석했다. 나치가 ‘너무 멀리 나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으며 나치 폭력은 그 자신이 경멸하는 질서(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의존하는 무력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유사사건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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