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감독입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민주주의 국가 아닌가요?”
웃고 떠들며 가볍게 전개되기 마련인 영화 제작보고회가 이토록 솔직하고 신랄하고 대범할 수 있을까. 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 멀티플렉스에서 열린 영화 ‘판도라’(12월 개봉) 제작보고회 현장은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영화인 시국 선언 자리 그 자체였다.
‘판도라’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으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뒤 벌어지는 초유의 재난 사태를 그린 영화로 제작 단계부터 충무로의 관심사였다. ‘터널’이나 ‘부산행’이 보여줬듯 재난영화의 특성상 무능한 정부를 꼬집을 게 뻔했고, 원전 폭발이라는 민감한 소재가 문제가 될 소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개봉은커녕 제작도 수월치 않을 것이라는 영화계의 우려를 반영하듯 ‘판도라’는 투자 유치 단계부터 수난을 겪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외부에 관리 위탁하는 모태펀드의 투자가 결정됐다가 철회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을 당했다. 투자배급사가 NEW라서 여러 해석을 낳기도 했다. NEW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을 투자배급한 뒤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기도 해 박근혜 정부에게 미운털이 박힌 것 아니냐는 말들이 적지 않았다.
이날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박정우 감독과 정진영 김남길 문정희 김대명 강신일 유승목 등 배우들은 긴장한 듯 무대에 올랐다. 강신일 문정희 김대명은 약속이나 한 듯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박 감독과 정진영은 거침없는 날 선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 ‘정부를 꼬집는 재난영화라 제작과 출연에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감독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이었지만 정작 정부는 원전 사업을 키워 나가기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저도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는 감독으로서 이런 소재로 창작하려고 할 때 스스로 자체 검열을 하게 되는 현실에 우울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정진영은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이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NEW에서 투자배급을 했는데 ‘변호인’ 이후 조금 힘들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걱정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창작자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하는 사회는 정말 못돼 먹은 사회다. 경천동지 할 만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정진영은 “숨겨져 있던 일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어 온 국민이 염려하는 상황이다”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가”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이날 제작보고회가 다소 격앙된 분위기에서 치러지다 보니 박근혜 정부에 대한 NEW의 ‘반격’ 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영화 제작보고회의 단골 진행자인 방송인 박경림 대신 박혜진 전 MBC 아나운서를 섭외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박 전 아나운서는 2012년 MBC 파업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MBC 퇴사 뒤 언론 시민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박 전 아나운서는 이날 행사 진행 중에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샤머니즘, 예지력이 좋다” 등 시국과 관련된 발언을 쏟아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NEW가 박 전 아나운서에게 (진지하게)아나운서 톤으로 진행해달라는 요구를 했다더라”고 전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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