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 의장 “野 대표부터 만나라”고사
청와대가 방문 의사 고집해 성사
朴, 野 피켓 시위대 그냥 지나쳐
녹차 대접했지만 손도 안대
8일 박근혜 대통령의 여의도 방문은 ‘속도전’에 가까웠다. 보름 전 국회 시정연설에서 ‘개헌’을 제안하며 정국을 흔들던 여유는 없었다.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을 불과 13분만에 끝내고 쏜살같이 국회를 빠져 나갔다. 공개, 비공개 회동을 합쳐도 박 대통령의 발언은 일곱 문장에 그쳤다. ‘회동이 아니라 대통령의 입장 발표 장소로 국회의장실을 잠시 빌린 것 같다’는 평가마저 나왔다. 정 의장은 전날 밤 회동 요청을 받고 “야당 대표들을 먼저 만나라”고 고사했지만, 청와대가 방문 의사를 끝내 굽히지 않으면서 이날 만남이 성사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30분 붉은색 톤의 상의에 목걸이를 착용하고 국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두 차례 대국민 담화에서 무채색 계열의 어두운 정장을 입고 액세서리를 배제했던 것과 대조됐다.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의 안내를 받으며 입장한 박 대통령은 간간이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본청 정면 출입구에 들어서자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피켓을 든 야3당 일부 의원들과 보좌진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닙니다”, “국민들 그만 힘들게 하시고 하야하세요” 등을 외쳤다. 박 대통령은 이들을 묵묵히 지켜보며 빠르게 지나쳤다.
정 의장은 회동에서 박 대통령의 건강 상태를 챙기고 “촛불 민심을 잘 수용해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달라”는 당부를 건네며 허심탄회한 대화를 유도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고견을 부탁 드린다”고 말문을 연 뒤 “국회에서 총리를 추천해달라”는 입장을 밝힌 것 이외에 별다른 발언을 내놓지 않았다. 정 의장이 신임 총리 권한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논란이 없도록 깔끔히 정리해야 한다”고 추가 설명을 요구했지만, 박 대통령은 “내각 통할”, “실질적 권한 보장” 등의 발언을 한 차례 더 반복했을 뿐이다. 배석한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과 허원제 정무수석도 국회 추천 총리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지원 사격에 나섰다.
국회의장실은 박 대통령에게 회동 시작 이후 녹차를 제공했으나, 박 대통령은 찻잔 뚜껑조차 손 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떠난 자리에 놓인 녹차의 온기는 그대로였다고 한다.
강윤주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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