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볼링 레인에 선 청년이 있다. 볼링공을 두 손으로 들고는 춤을 추듯 주춤거리다가 휙 던지곤 숨을 죽인다. 레인 중앙을 돌진하던 공은 여지없이 10개의 핀을 쓰러뜨린다. “파이팅!”하고 외치며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 청년은 뒤를 돌아 허공에 대고 하이파이브를 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이런 내용의 시나리오를 받아 든 배우라면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할 게 뻔하다. 볼링을 소재로 한 영화 ‘스플릿’(9일 개봉)에서 게임을 할 때마다 등장하는, 쉽게 이해 되지 않는 장면엔 사연이 하나 숨겨져 있다. 지적 장애와 자폐를 안은 볼링 천재 영훈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이다. 8세 때 데뷔해 올해로 데뷔 15년을 맞은 배우 이다윗(23)도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단다. 시나리오를 받으면 보통 한 시간 만에 후다닥 읽는 편인데 ‘스플릿’은 무려 4시간이나 걸렸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이다윗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구나 생각했다”며 “다음날 소속사에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얘기하려 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이는 신기하기도 할리우드 배우 톰 하디다. 이다윗은 하디가 1인 2역으로 주연한 영화 ‘레전드’를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마피아 조직에서 승승장구하는 레지와 로니 쌍둥이 형제를 혼자서 실감나게 연기해서다.
“캐릭터가 전혀 다른 두 형제를 하디가 감독에게 직접 제안해 연기했다고 하더군요, 순간 무언가가 제 가슴에 확 꽂히더라고요. 저는 (평범하지 않은 역할을)못하겠다고 도망치려 했는데, 그는 스스로 도전을 선택한 거잖아요. 순간 제가 너무 창피했어요.”
대선배 유해진의 따뜻한 조언도 그에게 모험심을 심어줬다. 이다윗은 영화 ‘적과의 동침’(2011)에 함께 출연했던 유해진에게 ‘고지전’(2011)을 준비하며 역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유해진은 “나도 (시나리오를) 볼 때마다 어렵다. 그렇지만 부딪쳐보고 도전하는 게 배우 아니겠느냐”며 용기를 줬다고 한다.
마음이 바뀐 이다윗은 ‘스플릿’의 최국희 감독을 만났고 곧 준비에 들어갔다. 먼저 심리치료 상담사를 찾아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지적 장애와 자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했고, 그들의 행동 성향도 연구했다. “그저 장애인 흉내나 내며” 탄로날 연기는 하기 싫었다. 3개월 동안 체계적으로 사전 준비 작업을 했다.
다음은 볼링이었다. 볼링을 배우기 위해 두 달간 레인 위에서 지냈다. 단순한 볼링 훈련이 아니었다. 정확한 볼링 자세가 아닌 엉거주춤한 폼을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했다.
영화는 비운의 볼링 국가대표 출신 철종(유지태)을 우연히 만나 도박볼링에 이용되는 영훈을 조명한다. 장애를 안은 것도 모자라 부모에게 버림받고 폭행당하는 영훈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만큼 이다윗의 연기가 가슴에 와 닿는다.
“영화 현장 경험이 많아 따로 걱정하지 않았다”는 유지태의 말처럼 이다윗은 어릴 때부터 알아서 하는 배우였다. KBS드라마 ‘매화연가’로 데뷔한 그는 중학교 입학 뒤 연기 활동에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 “휴대폰만 사주면 혼자 다니겠다”고 선언하고 홀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대풍수’ ‘이산’ ‘연개소문’ 등 드라마와 ‘시’ ‘적과의 동침’ ‘고지전’ ‘최종병기 활’ ‘더 테러 라이브’ 등의 영화로 경력을 쌓아갔다.
어느덧 충무로의 재목이 된 이다윗은 연기를 위해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많다. 그 중 음악이 요즘 가장 큰 관심사다. 아이돌그룹 엑소의 멤버 도경수와 ‘순정’을 통해 친해져서 일까. “노래하고 악기를 다루는 음악 공부를 하고 싶어요. 직접 작곡도 해보고 싶고요. 아, 그간 머릿속에서만 계획했던 단편영화도 연출해보고 싶어요.”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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