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는 9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무척 재미있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았다.
평론가들은 그의 새로움과 예술에 대한 사유에 주목하는 듯하다.‘콜라주 스토리텔링으로 새로운 서사적 탈주를 시도하는 도서관 작가’ ‘예술에 대해 던지는 메타적 테제’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사유가 새로운 형식의 산문적 스펙트럼으로 확장’ 등으로 정지돈 소설의 매력을 설명한다.
그 말대로이다. 정지돈은 이질적인 콜라주는 물론, 이야기를 끌어가는 시점화자조차 일관되지 않으며, 지문과 인용을 뒤섞어서 내레이션을 만든다. 등장인물들은 예술과 혁명에 관련된 전 세계의 문제적 시대를 순례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의 기행과 망상의 연대기가 연쇄적으로 펼쳐진다. 평범한 주변인물도 등장하지만 역시 쓰거나 읽는 일에 연관되며 무력하고 회의적인 탐색과 방황 가운데 있다. 전위와 변방이, 진지한 열정과 허무적인 냉소가 겹쳤다가 멀어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정지돈 소설의 재미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쓰는 자의 새로움이 읽는 자의 새로움을 보전해주지는 않으며 작가라면 누구나 예술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돈 소설의 등장인물은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민중의 진정한 삶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알아먹을 수 없는’ 이야기만 한다는 게 탄압의 이유였다.” 거기에 대해 그는 “‘대체 알아먹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응수했다.” 그 소설에서 그는“파편적이고 우연적인 서술을 시도함으로써 사실 이상의 사실이 드러나길 원했”다. 이 소설은“설명이 안 돼. 내러티브가 아니라 문장으로 말하는 소설이야”.
이게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다. 지구에 온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을 시도하는 언어학자의 이야기이다. 그 생명체는 몸통에서 7개의 가지가 뻗어 나와 있는데, 그 하나하나에 눈이 달려 있다. 앞뒤와 위아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문자는 통사 구조가 아니라 그래픽디자인 같은 기호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즉 어떤 뜻을 가진 기호에다 새로운 기호를 방향 없이 덧붙임으로써 끊임없이 거대하게 확장돼가는 문자인 것이다. 이것은 다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다. 차원에 대한 상상력이다. 마치 정지돈의 소설처럼. ‘내가 싸우듯이’는 예술이라는 실패한 혁명에 대한 환멸을 넘어설 수 있는 일종의’비전’을 찾으려는 게 아니었을까.
그가 소설 속에 인용한 플로베르에 따르면 “내가 예술에서 가장 고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를 웃거나 울게 하는 것도 아니요, 흥분시키거나 격동시키는 것도 아니요, 나를 꿈꾸게 하는 것이다.” 아마 그것이 정지돈이 찾아낸 “자신의 형식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일지도 모른다.
정지돈 소설을 읽는 것은 가수면 상태에서 꿈을 꾸는 일 같다. 꿈 속에서 나의 논리와 감정은 예민하며 행복과 슬픔은 절실하다. 그러나 이것이 꿈이란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전에 꾸어본 적 있는 꿈이기 때문이다. 지금 겪고 있는 일이 현실이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실패로 끝나는 사실 또한 알고 있기 때문에 꿈꾸는 내내 고통스럽다. 이것은 정지돈이 소설, 즉 이야기와 언어를 갖고 벌이는 자기과시적이며 동시에 폐쇄적인 퍼포먼스일까. 말이 되는 동시에 의미가 없다. 그래서 재미있다.
은희경 소설가
작가 약력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나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젊은작가상 대상과 2016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내가 싸우듯이’는 작가의 첫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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