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아기 방 꾸미는 일에 마음을 팔고 있는 중이다. 벽지를 핑크색으로 할까, 민트색으로 할까. 기린 모양 자석칠판을 붙여줄까, 로봇 모양 자석칠판을 붙여줄까. 작은 오두막집은 꼭 들여놔야지. 아기가 아장아장 오두막집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귀여울까. 밋밋한 형광등은 떼어내고 비행기 모양을 한 전등으로 바꿔줄 테야. 어린이집 대기 신청도 걸어두어야 하고 유치원도 일찌감치 신청해야 한다던데. 우리 아기는 바로 저기, 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겠네. 즐거운 상상은 딱 여기까지다. 학교라니. 나는 사실 걱정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다. 내 아기가 이 나라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나. 내가 그동안 이곳에서 본 아이들은 지금껏 다 어떠했나. 그들은 피기도 전에 이미 시든 꽃 같지 않았나. 비겁과 반칙을 숱하게 목격해도, 이제껏 그래왔으니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아이들은 지레 시니컬한 얼굴을 하고 그저 선행학습이나 줄기차게 해오지 않았나.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그래서 나는 화가 자주 났다. 걱정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안전하니까 마음대로 뛰어다녀!”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애가 말랐다. 그럼에도 광화문에 나앉은 중학생들을 본다. 마이크를 잡고 피켓을 든 고등학생도 본다. 할 말 따박따박 잘 하는 아이들이 신기하고 예뻐서 한참을 본다. 훗날 내 아기가 이 아이들 틈에 끼어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었으면 좋겠다. “엄마! 친구들이랑 광장에 나왔는데 너무 오래 걸어서 배고파!” 그러면 내가 당장 버거킹에 들러 와퍼를 열 개쯤 사들고 달려갈 텐데. 시든 꽃이 아니라 서툰 꽃이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구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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