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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안고, 교복 입고, 지팡이 짚고… 세대ㆍ이념 초월 ‘성난 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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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안고, 교복 입고, 지팡이 짚고… 세대ㆍ이념 초월 ‘성난 민심’

입력
2016.11.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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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불의 가득찬 미래 살지 않게”

“빽 있는 자들의 비위 행태 못참아”

“朴 옹호했던 나를 반성하는 자리”

이번 주말 시위 땐 더 거세질 듯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 집회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정권 퇴진’ 집회에 참여한 중고등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연합뉴스

5일 오후 8시 직장인 황성현(39)씨는 서울 광화문광장 한 복판에 서 있었다. 황씨는 자신을 평소 세월호 사태,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 등 정치ㆍ사회 현안에 문제 의식을 공유하지만 행동은 주저하는 ‘소극적 비판론자’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아내(35) 손을 잡고 이른 아침부터 고 백남기씨 미사와 영결식에 함께 하고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해 기꺼이 촛불도 들었다. 황씨는 “가족과 친구, 이웃을 위한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신념에 빈부와 남녀노소, 계층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며 “광장에 와 보니 뜻을 같이 하는 시민이 상상 외로 많아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고 말했다.

예상을 뛰어 넘는 규모였다. 이날 밤 광화문광장을 비롯한 서울 도심은 20만 물결이 토해내는 분노의 함성으로 넘쳐났다. 그만큼 정당성을 상실한 정권에 향하는 민심의 칼날은 매서웠다. 당초 이날 촛불집회는 지난달 29일 500여개 시민ㆍ사회단체가 모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집회신고를 하면서 준비됐다. 하지만 투쟁본부는 정권 퇴진을 목놓아 외칠 수 있는 민의(民意)의 장을 제공했을 뿐이다. 투쟁본부 관계자는 “설마 10만명을 넘겠느냐는 예측은 완전한 기우였다”며 “시민이 주체가 된 성난 민심이 이토록 거셀 줄은 몰랐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집회 참가자 면면을 보면 앞으로 저항의 파고가 간단치 않음을 가늠케 한다. 갓난 아이를 안고, 또 초등생 자녀 손을 잡고 거리로 나온 가족 단위 참가자가 상당했다. 갓 돌을 지난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목청을 높인 김성규(30)씨는 “아이가 혹시 다칠까 걱정도 됐지만 절망적 상황을 방치하면 딸은 또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 살 게 뻔해 단단히 채비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박근혜정부의 우군인 장년층도 거리집회를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방치하지 않았다. 87년 민주화항쟁을 이끈 5060세대는 물론 4ㆍ19혁명의 선두에 선 70대까지 전부 힘을 보탰다. 딸(26)과 함께 촛불을 든 최은희(54ㆍ여)씨는 “민주화항쟁에 참여했던 당시의 기억을 살려 30년 만에 광장으로 왔다”며 “이날 집회는 그간 사회안정을 바란다는 이유로 박 대통령을 옹호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노동, 복지 등 개별 이슈와 특정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하지 않고 ‘비선실세의 국정농락’이라는 하나의 문제의식을 고리로 한 ‘느슨한 연대’는 이념ㆍ세대를 초월해 시민을 거리로 이끈 원천이었다. 이날 집회에서는 마냥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교복 부대’의 울림이 유독 컸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중ㆍ고생 500여명은 청소년단체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을 보고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특히 국정농락 주범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입학 특혜 의혹에 크게 분노했다. 고교 1학년 김상준(17)군은 “언론 보도와 SNS에 도배된 소위 ‘빽’있는 자들의 비위 행태를 보고 어차피 우리가 살아갈 미래인데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용기를 냈다”고 했다.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세월호 참사와 국정교과서, 백남기 농민 사태 등을 겪으며 절망감에 빠진 다수의 국민에게 동질감이 생겼다”며 “소규모 공동체끼리 공유한 분노가 하나로 결집돼 거대한 함성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연대 의식은 “국민이 옳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됐다. 이미 집회 전 대학가를 비롯, 노동 언론 문화 등 사회 전 분야에서 시국선언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고 SNS는 민심의 물결을 한 데 모으는 정보 창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집회 전날인 4일 오후부터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는 ‘#가자_광화문으로’ ‘#모여라_촛불’ 등 해시태그(#)가 널리 퍼져 망설이는 개인을 불러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SNS는 일종의 소속감을 환기시키면서 ‘정권이 틀리고 분노하는 국민이 맞다’는 도덕적 우월감을 갖게 했다”고 설명했다.

시민들의 분노는 이제 12일 예정된 민중총궐기 대회를 정조준하고 있다. 한상희 교수는 “정권퇴진을 바라는 국민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역풍이 불 가능성은 작아졌다”며 “박 대통령이 특단의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하야ㆍ탄핵 운동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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