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1월 7일
1917년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발발 시점에 따라 2월-10월 혁명으로 구분해온 것은 당시 러시아 역법(曆法), 즉 율리우스력에 근거한 것이다. 현행 그레고리력은 교황 그레고리아 13세에 의해 1582년 채택됐지만, 프로테스탄트와 정교회 국가들은 종교ㆍ권력적인 이유로 율리우스력을 고수했고, 특히 러시아는 혁명 직후인 1918년 1월 31일에야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그래서 2월 첫 날은 2월 14일, 러시아 혁명은 현행 역법으로는 각각 3월-11월 혁명이다.
1917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새벽 2시 볼세비키 혁명군(적위대)이 부르주아 임시정부 거점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을 함락, 오전 10시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선언했다. 20세기 최대의 사건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 정부가 99년 전 오늘 탄생했다.
혁명 이후의 러시아, 스탈린 체제의 소비에트 연방공화국과 그 이후의 이념적ㆍ정치적 타락과 실패는 혁명 직후부터 약 5년 간 이어진 백군과의 내전에 큰 책임이 있다. 1차대전 연합국을 중심으로 혁명 러시아에 대한 군사적ㆍ경제적 견제가 극심했고, 경제는 혁명 전과 다를 바 없거나 오히려 더 악화했다. 볼세비키 정권은 이념의 실천보다 체제 안정과 보위, 이후로는 권력 쟁탈과 유지가 우선이었다.
민주주의도, 프롤레타리아 일당독재도 그 과정에서 실종됐다. 반대파 탄압을 위한 비밀경찰제를 비롯한 억압적 공포정치는 냉전과 함께 8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군비에 쏟아야 할 자원 비중도 서방과 비교할 수 없이 컸다. 교조적 사회주의자 중에는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인류의 사회주의 실험은 단 한 번도 이뤄지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보수 언론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곤 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진보(?) 정치’를 두고도 비슷하게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념 시비와 탄핵 등 집권 초기부터 시작된 보수 언론과 기득권 세력의 포화에 책임의 큰 몫을 돌리는 논리. 하지만 혁명 이후의 반혁명이 역사의 상수이듯, 두 정부의 실패와 퇴행을 보수의 견제 탓으로 돌리는 건 무의미하다. 그건 무능과 타락 탓이었다. 얼마나 무능했고 여전히 무능한지, 그들의 오늘이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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