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민중화가인 홍성담씨는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박근혜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묘사한 작품을 선보이려 했다. 이 그림은 박 대통령의 뒤에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서 있는 내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죽은 아버지와 현 정부의 2인자로 불린 ‘왕비서’의 조종을 받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풍자한 그림이다.
이 작품이 최근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그림처럼 박 대통령이 사상 초유의 허수아비 대통령이 아니냐는 의혹들이 속속 제기되기 때문이다. 한 작가는 ‘비선 실세’로 박 대통령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국정을 농단해 온 최순실씨를 이 그림에 추가한 패러디물을 공개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정계에 입문한 뒤 20여년 동안 ‘민낯’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즉 그의 생각이나 속을 알 수 있는 언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언행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느낌과 함께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는 신호가 적지 않았다.
우선 ‘유신공주’‘수첩 공주’ ‘100단어 공주’‘버벅공주’ 등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별명부터 그렇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은 ‘공주’로 정계에 입문했지만 지도자로서 정책 비전이나 철학은 커녕 ‘수첩’이 없으면 제대로 된 문장 하나 말하기 힘든 게 아니냐는 의심이 섞인 별명들이다. 더불어 이런 별명들 속에는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는 불통의 이미지도 강하다.
일찍부터 시작된 불통의 삶
여기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산 박 대통령의 젊은 시절도 한 몫 한다. 박 대통령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1년 5.16 쿠데타에 성공해 1963년 대통령이 되면서 성심여중 2학년 시절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사실상 그때부터 외부와 단절된 삶을 산 셈이다.
이후 박 대통령의 삶은 자신의 주체적 의지보다는 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많이 좌우됐다.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대학은 중공업으로 국가를 살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대로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박 대통령은 1974년 대학 졸업 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지만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절 기념식 행사 도중 총에 맞아 숨지면서 6개월 만에 급히 귀국했다. 그때부터 영부인을 대신해 박정희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면서 22세 나이에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다. 국빈 방문하는 외국 정상들을 접견하고 국내의 주요한 행사에도 함께 참석하면서 더욱 고립된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접근한 인물이 최순실씨의 부친인 고 최태민씨다. 최태민씨는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대통령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보내 접근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최태민씨는 현몽을 통해 육 여사를 꿈에 볼 수 있다는 말 등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현혹했다고 한다. 이단종교 전문가였던 고 탁명환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은 28년전 월간지 ‘현대종교’에 실었던 글을 통해 자신이 만났던 최태민씨가 유난히 무당들의 신기(神氣)를 빼앗는 영적 능력이 강했던 ‘대무당’이라고 전했다.
탁 소장에 따르면 최태민씨는 단순 영애양을 위로하는 데서 그쳤다면 다행인데 이후 육영재단, 구국십자군, 새마음운동 등 각종 단체에 관여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 들여 호가호위의 수단으로 삼았다. 당연히 정권에서도 문제를 삼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차지철 경호실장을 비롯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 정보기관들도 최태민의 영향력을 경고하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악연이 결국 지금의 최순실 게이트로 이어졌다는 세간의 추측이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다. 그는 근령, 지만 등 두 동생을 데리고 서울 신당동의 부모님이 살았던 집으로 들어간 뒤 1997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만나 이듬해 대구 달성군 재보궐선거에 당선되며 정계 입문할 때까지 18년의 세월을 베일 속에 살았다.
도대체 그동안 무엇을 했는 지 세상 사람들도 모르지만 박 대통령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하며 순탄치 않은 삶을 암시했다. 세간에서는 이 시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최태민씨 일가와 더욱 가까워지면서 가족 이상의 각별한 관계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직 사퇴합니다”..중요한 순간마다 터진 말실수
정계에 입문한 뒤 박근혜 대통령의 언행은 베일에 싸인 삶 만큼이나 이해하기 힘든 일들 투성이다.
“저는 오늘로 지난 15년간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누었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2012년 제 18대 대통령선거 후보 등록 첫날인 11월25일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느닷없이 “대통령직을 사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는 말을 잘못 얘기한 것이다. 긴장한 순간에 나온 실수로 볼 수 있는데, 공개석상에서 저지른 황당한 실수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번 논쟁을 전화위기(‘전화위복’의 잘못)로 삼아..”
“이산화까스(‘이산화탄소’의 잘못)를 배출하는 데에..”
“위장전업(‘위장전입’의 잘못)에..”
“바쁜 벌꿀(‘꿀벌’의 잘못)은 슬퍼할 시간도 없다”
이 같은 문제점은 대통령 후보 간의 TV토론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의 3차 TV토론에서 과학기술 발전 방안에 관한 질의에 “그래서 대통령 되려는 거 아녜요”라고 말하며 웃음으로 넘기는 장면은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 유시민ㆍ전여옥의 예언
“무섭고 걱정된다. 논리나 말로 타인을 설득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힘을 쓰게 되고,사리에 어두운 박근혜 대통령 주변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환관정치를 하게 된다”
2012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은 박 대통령 취임식 전날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 같은 말을 했다. 포털사이트에 ‘유시민’을 쓰면 연관 검색어로 가장 먼저 ‘예언’이 뜰 정도로 이 발언은 화제를 모았다. 유 전 장관은 “이치에 밝은 지도자가 아니다”라며 “5선 의원 하면서 입법을 제대로 한 게 있나, 자기 브랜드의 정책이 있었나”라고 박 대통령의 자질을 지적했다.
또 유 전 장관이 재임시절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와 협상을 벌였던 일도 회자 되고 있다. 당시 유 전 장관은 국민연금과 관련해 박 대표와 두 달 간 비밀협상을 했는데 막판에 결렬됐다. 이유는 박 대표가 ‘한나라당안과 정부안의 차이가 3,000억원 밖에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두 안의 비용 차이는 7조원이다. 유 전 장관은 “누군가 중간에 보고를 틀어버리면 잘못된 보고라는 것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은 최측근이었던 전여옥 전 의원이다. 그는 2012년 1월 제 19대 총선 출마 전에 내놓은 책 ‘i 전여옥’에서 박 대통령에 대해 지금의 현실과 비교할 만한 혹독한 평가를 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반박(反朴)’으로 돌아선 이유를 설명하며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도, 돼서도 안 된다”며 “정치적 식견·인문학적 컨텐츠도 부족하고 신문기사를 깊이 있게 이해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박근혜는 ‘대전은요? ‘참 나쁜 대통령’처럼 늘 짧게 대답한다”며 “국민들은 처음에 무슨 심오한 뜻이 있겠거니 했는데 사실 아무 내용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찌 보면 말 배우는 어린애들이 흔히 쓰는 '베이비 토크'와 다른 점이 없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역대 최저 지지율을 부른 불신의 아이콘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문제점들은 취임 이후에도 줄곧 논란이 됐다. 대선후보 시절 TV 토론회를 이리저리 피해 다녔던 그는 취임 후에도 되도록 마이크 앞에 서지 않았다. 그 바람에 메르스 파동 때 황교안 국무총리가 대국민사과를 대신했다.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국민들에게 정책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약 150여회씩 했고 이명박 대통령도 20여회 가졌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 3년 동안 기자회견을 단 네 차례만 했고 그마저도 기자들의 질문지를 미리 받아 질문 순서를 정해놓는 식으로 진행했다.
말을 아끼는 와중에 던진 발언들도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됐다. 취임 1년 후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갑자기 ‘통일 대박론’을 주장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신년 정부 부처 업무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국무조정실에 대해 ‘한번 물면 살점이 완전히 뜯겨나갈 때까지 안 놓는’ 진돗개 정신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비정상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맥락 없이 던지는 이런 말들을 두고 정확한 의미와 표현의 적절성에 대해 말들이 많았다.
심지어 외교 무대에서 일어난 실수들은 온 국민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2014년 오바마 미국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외신기자의 질문에 “어, 그, 저…”하며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자 옆에 서있던 오바마 대통령이 “불쌍한 대통령이 질문을 잊으신 모양이다”라고 말하며 웃어 뜻하지 않은 망신을 샀다. 결국 힘들게 대답하긴 했지만 질문 내용과 동 떨어진 답변이었다.
문제는 개인의 문제점을 벗어나 최순실 게이트라는 국정 농단 사태로까지 번졌는데도 잘못을 반성하고 제대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이 된 상황에서도 여야 협의 없이 독단적인 국무총리 임명을 강행하고 전말을 솔직하게 털어놓지도 않고 있으며 이후 거취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태도로 강한 집권욕을 드러내면서 불통 뿐만 아니라 불신의 아이콘이 돼 버렸다. 역대 대통령 중 최저 수준인 5%까지 추락한 지지율은 그만큼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크다는 반증이다.
유환구기자 red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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