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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길이 없다

입력
2016.11.04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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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러 엉덩이에 돈을 깔고 살아? 집 같은 거 안 사.” 그렇게 말하던 H 언니가 결국 집을 사기로 한 건 전세금이나 집값이나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 데다 2년마다 꼬박꼬박 이사를 하는 일에 이제 넌더리가 난 탓이었다. 다행히 H 언니는 마음에 꼭 드는 아파트를 찾았다. 지하철 역 바로 앞이어서 출퇴근이 쉽다는 점이 제일 매력적이었다. “단지 안에 어린이집이 네 곳이나 있고 초등학교도 있대.” 결혼도 안 했으면서 H 언니는 부동산 중개인의 말에 홀딱 넘어갔다. 집을 다시 살펴보러 간 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큰일 났어. 길이 없어.” 무슨 소리인가 했다. 이제 입주를 앞둔 아파트 단지는 정말 지하철 역 코앞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만 지어졌지 역으로 난 길이 없다는 거였다. “아파트가 바로 앞에 보이는데 진짜야, 길이 없다니까.” 알고 보니 역과 아파트 사이 토지보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 길을 못 냈단다.

H 언니는 논두렁을 돌고 돌아 겨우 아파트 입구까지 갔다. 바짓자락에는 도깨비풀이 잔뜩 붙었다. 돌아오는 길은 더 험했다. 날이 어두워졌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새까만 논두렁길이었다.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어려워 언니는 휴대전화 랜턴을 켠 채 뱅뱅 돌았다. “어쩌지? 길이 끊겼어. 저기 역이 보이는데, 웅덩이가 있어. 못 건너.” 언니는 다시 돌아나왔고 멀지도 않은 지하철 역을 향해 지치도록 걸었다. 언니의 만보계에는 1만7,000걸음이 찍혔다. “그래도 사야겠지? 언젠가는 길이 생길 거 아냐.” H 언니의 말에 나는 웃느라 대꾸도 제대로 못했다. 온통 길 없는 광경이다. 때로 길을 잃고 때로 길이 없지만 그래, 설마, 언젠가는 길이 보이겠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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