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상 제도 아닌 정치적 용어

헌법에 규정된 국무총리의 역할과 권한은 국무위원 제청권(제87조 1항)과 해임건의권(제86조 3항)을 포함한 정부구성권, 행정각부 통할권(제86조 2항)ㆍ총리령 발령권(제95조)ㆍ부서(副署ㆍ문서에 함께 서명하는 행위)권(제82조) 등의 정부운영권을 꼽을 수 있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자는 취지다. 하지만 헌법상 권한의 의미와 한계가 모호하고 이중적이어서 현실에서는 책임총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현직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권한을 상당 부분 내려놓지 않는다면 이를 제도적으로 강제할 수단은 없다.
그러므로 책임총리는 헌법에 명시된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 용어다. 헌법에서 규정한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 등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선언적 의미로 봐야 한다. 실제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지적되거나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에 몰렸을 때 주로 거론돼 왔다. 대통령이 권력을 상당 부분 내려놓아야 책임총리가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책임총리를 구현했다고 볼 수 있는 전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문민정부 시절 이회창 전 총리는 책임총리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지만, 총리 권한을 놓고 대통령과 충돌하면서 4개월 만에 하차했다.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우르과이라운드(UR) 협상 타결에 따른 쌀시장 개방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리자 1993년 12월 감사원장이던 이 전 총리를 발탁해 조각수준의 쇄신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이 전 총리는 ‘대독총리’에 머물지 않고 헌법상 총리의 권한을 적극 행사하며 책임총리 실험에 나섰지만, 김 전 대통령이 이를 ‘통치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나마 참여정부의 이해찬 전 총리는 책임총리에 가장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전 총리는 내치를 책임진 ‘분권형 총리’로 실질적으로 국정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정치적 동지와도 같았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의 전폭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정부의 경우 김종필 전 총리가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하지만 책임총리라기보다는 DJP연합을 통해 집권한 연립정부 성격이 더 강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대선 공약으로 책임총리를 제시하기는 했다. 하지만 정홍원 전 총리와 황교안 총리 모두 대통령의 뜻을 충실히 전달하고 지시를 이행하는 데 주력하면서 ‘의전 총리’ ‘관리형 총리’에 머물렀다.
이동현 기자 nan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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