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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긴 주술의 날들

입력
2016.11.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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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날이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뉴스가 전해지던 날, 나 역시 망연자실 할 말을 잃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뉴스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을 읽었다. 평소에 댓글 따위는 거의 보지 않는데 그 날 밤은 다른 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마 내가 받은 충격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던가, 어떤 파문이 일어날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엇비슷한 놀람과 비통 가운데 드문드문 ‘울고 있다’는 댓글들이 있었다. 애국이나 국가주의와는 꽤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를 울린 댓글은 ‘평생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오늘은 자꾸 눈물이 납니다’라는 것이었다. 새벽에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를 끄면서 문득 생각했다. 그 날이 어쩌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첫날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고.

많은 문학작품 속에 주술이 등장한다. 특히 아이들이 즐겨 읽는 서양의 동화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주술은 작품의 결정적인 뼈대 역할을 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예언가나 주술사가 말하는 것은 당연히 그대로 발생하여 현실을 왜곡하고 파탄을 부르며 주인공들을 고통으로 내몬다. 백설공주는 주문에 답하는 거울과 독사과로 인해 긴 잠에 빠지고, 세 명의 마녀들로부터 왕이 될 거라는 주술을 받은 맥베스는 치명적인 비극으로 달려간다. 문학 속 주술은 대게 두 개의 결론, 즉 백마 탄 왕자의 키스로 풀리는 해피엔딩이나 죽음과 파멸로 끝을 맺는다.

주술은 한 사회에도 깊이 드리워 있다. 어쩌면 각 시대의 역사적 조건 자체가 하나의 주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를 돌아볼 때 현재의 관점뿐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염두에 둔다. 중세시대를 두고 민주주의의 결핍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사는 작금 역시 먼 후대가 이해하지 못할 어두운 주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을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이미 눈에 보이는 주술들이 그동안 얼마나 많이 떠돌았던가. 돌이켜보면 둔감한 내가 충격을 받은 첫 번째 주술은 갑자기 일어난 박정희 찬양이었다. 유신 시대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고 오랜 망령에서 비로소 벗어났다고 느끼는 순간 들려온 그 주술은 끈질긴 바이러스처럼 우리 사회를 전염시켰다. 민주주의가 진전하고 있다는 느낌과 박정희의 부활은 고통스러운 혼돈이었다. 혼돈을 넘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불신과 세대 갈등, 소통을 가로막는 주원인이었다. 과연 그 불통은 광화문에 그의 동상을 세우자는 황당한 주장까지 이르렀다.

우리를 괴롭혀온 또 하나의 주술은 역시 마법의 언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위 ‘종북논란’이었다. 나는 그 역시도 박정희의 주술에서 가지를 뻗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맹렬한 반공과 온갖 마타도어로 백성들의 머릿속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유신의 망령이 옷을 갈아입은 게 종북이었다. 그리고 백성들 마음속에 그 망령이 살아나는 순간, 우리 사회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저마다 그 혐의에서만은 벗어나려 했고 심지어 함께했던 동료에게도 휘두르는 흉기가 되었다. 결정적인 무기 앞에 우리가 쌓아온 민주주의의 근간이 하나둘 무너지더니, 국민이 뽑은 정당을 해산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주술은 흉흉하고도 잔인한 언어로 번역되어 사이버 공간을 초토화했고 이에 편승한 정치 모리배들이 부리는 병적인 발작마저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

무엇보다 모두에게 신화가 되어버린 주술은 ‘돈’이었다. 서로에게 부자가 되라는 인사는 서로를 짓밟기 위한 은밀한 탐색이었고, 성공한 기업가에게 나라를 맡기겠다는 전폭적인 지지는 그의 성공이 내 것이 될 거라는 미친 욕망이었다.

비로소 하나의 주술에서 풀려났다. 왕자님의 키스가 아니라 하나의 뉴스로 시작된 각성제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백설공주의 미래가 남아있을까. 이제 맥베스의 비극, 그 맹렬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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