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1월 3일
프랑스 혁명의 ‘혁명’을 향해 혼자 힘차게 내달았던 18세기 말 페미니스트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rges)가 1793년 11월 3일 숨졌다. 꼭 보름 전 단두대에 선 첫 여성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구체제의 상징이었다면, 두 번째 여성 구주는 혁명이 도달해야 했던 새 체제의 상징이었다. 구주의 상징, 즉 모든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급진 공화파 권력자들과 18세기 계몽주의가 구체제의 부활만큼이나 두려워 엄두를 못 내던 가치였다.
구주의 죄명은 반혁명이었지만, 형 집행 직후 코뮌의 파리 지역검사 피에르 쇼메트(Pierre Chaumette)가 말했듯, 그의 ‘죄’는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 거였다. “저 남자 같은 여자, 여자 남자, 살림은 버려두고 정치를 하려 했고 범죄를 저지른 무분별한 올랭프 드 구주를 떠올려보시오.(…) 자기 성별의 미덕을 망각한 것이 그녀를 처형대로 이끌었습니다.” ‘성별의 미덕’이란 계몽주의가 당연시하던 ‘남녀의 역할 분리’즉, 모든 인간은 이성을 지닌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지만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 때문에 남자의 영역을 넘봐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그 이데올로기에 대고 구주는 “도대체 여자를 억누를 수 있는 특권이 어디서 나왔는지 말해다오. 당신들의 완력인가, 재능인가”(1791년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 선언’)라고 따져 물었다.
흑인노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시대에 구주는 일찌감치 희곡과 평론 등을 통해 흑인 인권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고, 종교결혼 대신 커플의 시민계약 결혼 및 이혼의 제도화를 제안했다. 단두대에 설 수 있다면 연단에도 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는 “여성들의 가장 큰 적은 여성들 자신”이라는 말도 남겼다. 당대 여성의 각성과 연대를 촉구하며 한 말이었다. “언제까지 여성들은 서로 고립된 채 사회에 참여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性)을 업신여기고 타인의 동정을 구할 것입니까?”
(‘올랭프 드 구주의 말과 글, 그리고 혁명적 페미니즘’, 성일권 – ‘프랑스문화연구 제21집’과 브누아트 그루의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참조.)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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