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크리지 주민 “클린턴에 별 관심 없어”
시카고 옆 전형적 백인 중산층 마을
생가에는 남은 흔적 하나도 없어
고향 등진지 50여년… 가족도 이주
당선 가능성 높아지자 기대감도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고향집을 찾아 가는 길은 고즈넉했다. 시카고 도심에서 30㎞가량 떨어진 그의 고향 일리노이주 파크리지(Park Ridge)도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 마을처럼 조용하고 깔끔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고향마을 사람들은 정작 클린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예 관심이 없다는 주민도 있었다. 베들레헴에서 배척당한 예수가 “선지자라도 고향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고 말한 성경(마태복음) 구절이 틀리지 않은 셈이다.
29일 도착한 파크리지에서 어린 시절 힐러리 로댐으로 불리던 클린턴의 집 ‘와이즈너가 235번지’를 찾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대통령 영부인을 지낸 대선 후보의 생가인데도 관련 안내판이 전무했다. 도로 표지판을 살펴 겨우 찾은 와이즈너가는 한산했다. 집집마다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시카고 컵스 팀을 응원하는 포스터와 핼러윈 데이 장식들로 단장했지만 클린턴 지지 푯말은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선 후보와 같은 당의 마이클 매컬리프 하원의원 지지 표지판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클린턴의 생가인 235번지 건물에도 그의 흔적은 없었다. 핼러윈 장식과 성조기, 컵스 응원깃발로 꾸며진 이웃과는 달리 앞마당에 두 그루 단풍나무만 서 있었다. 1926년 지어진 주택에 클린턴의 친정 로댐 가족이 1940년대부터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진이나 어떤 설명도 없었다. 잘 깎인 앞마당 잔디로 미뤄 누군가 살고는 있는 게 분명했지만 집주인은 클린턴과의 인연이 자랑스럽지 않은 듯했다. 현지 부동산정보 사이트에 따르면 시세가 50만5,000달러(약 5억7,000만원)인 클린턴의 고향집은 클린턴 친정과는 무관한 사람의 소유였다.
와이즈너가에 접어 들었을 때처럼 클린턴 생가 주변도 인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을 넘게 서성이다가 겨우 만난 이웃 주민은 ‘한국 언론에서 클린턴 생가를 방문했다’는 사실에 도리어 놀라워했다. ‘대선에서 누구를 찍을 거냐’고 묻는 말에 50대쯤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은 즉답을 피하다가 “파크리지 사람들은 클린턴에게 관심이 많지 않다”는 말을 털어놨다.
지역 언론인 시카고 트리뷴에 따르면 클린턴이 지난 5월 13년 만에 고향을 찾았을 때도 환대를 받지 못했다. 당시 정치자금 모금행사를 겸한 비공개 환영행사장가 열린 시내 극장 주변으로 주민 100여명이 몰려와 “클린턴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시위대는 이 지역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폴란드ㆍ체코계 이민자들이었는데 ‘폴란드ㆍ체코 등 동유럽국가의 민주주의에 회의적이다’라는 클린턴 발언에 격분해 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최고권력 문턱에 도달한 대선 후보가 고향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미국 언론들은 우선 1965년 메인 사우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등지고 살았던 클린턴의 과거를 꼽았다. 클린턴의 부모마저 1987년 40년 넘게 살던 집을 처분하고 클린턴을 따라 아칸소 주로 이주하면서 로댐 가문은 사실상 고향에서 잊어진 존재가 됐다. 아버지 휴 로댐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공화당 성향이던 클린턴이 웰즐리 대학에 입학한 뒤 민주당으로 전향한 점 또한 연속성을 단절시킨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때문에 2008년 이 지역 민주당 경선에서 클린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패하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최근 클린턴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일부에서는 분위기 반전도 감지되고 있었다. 지난달 25일 클린턴 모교에서 진행된 모의투표 결과, 클린턴은 49%의 득표율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40%) 후보를 꺾었다.
파크리지 시의회와 집행부에서도 클린턴 지지세가 확산되고 있다. 파크리지 문화유산위원회 밀튼 넬슨 위원은 “시내 한 복판에는 파크리지의 역사적 인물ㆍ사건을 기록하는 34개 화강암으로 꾸며진 기념물이 있다”며 “아직 한 면이 비어있는데, 클린턴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클린턴이 당선되면 소유주의 비협조로 지지부진한 생가를 역사적 기념물로 조성하는 방안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파크리지(일리노이)=조형선 통신원(시카고대 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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