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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할 수 없어 생략된 그들의 삶, 우리의 문학

입력
2016.11.02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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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는 존재하지만 생략돼온 ‘바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작가다. 문학동네 제공
윤성희는 존재하지만 생략돼온 ‘바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온 작가다. 문학동네 제공

서사에서 배제돼 온 목소리 담아

남성 중심 문학에 대한 반박일까

요약하면 멋쩍어지는 일들이 있다. 이 문장은 두 가지 뜻으로 읽힌다.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요약하고 보면 멋쩍은 일이라는 의미로. 또는 요약이라는 행위 자체를 멋쩍게 만드는 일이라는 의미로.

전자가 삶이라면 후자는 소설이어야 한다. 소설이다, 라고 쓰지 않고 소설이어야 한다, 라고 쓰는 건 여전히 많은 소설들이 삶을 요약하기 때문이다. 메인플롯과 몇 개의 서브플롯으로. 극적인 사건들의 연쇄로. 발단과 전개와 위기와 절정과 결말을 갖춘 이야기로. 그 끝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에피파니(현현ㆍ顯現)로. 이때 요약은 불가피하게 보인다. 모든 삶은 한 권의 책에 담기에는 너무 길고, 긴 삶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이야기는 너무 많다.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광고, 웹툰, 게임, 몇 장으로 이루어진 ‘짤’, SNS를 떠도는 각종 음모론과 그것을 뛰어넘는 정치 뉴스에 이르기까지. 이런 현실에서 전통적인 소설이라는 형태로 매끈하게 요약되고 가공된 이야기가 다른 장르의 이야기들보다 특별할 이유는 찾기 힘들다. 오해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특별할 이유는 찾기 힘들다고 썼고, 그것은 문학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을 새롭게 갱신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전통적인 소설이라는 관념은 내게 칠순 잔치를 떠올리게 한다. 다섯 번째 소설집에 실린 ‘가볍게 하는 말’의 한 장면을 윤성희는 이렇게 쓴다.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디를 했다. 모든 집이 무탈하게 살게 되어 행복하다고. 이만하면 우리 집안도 성공한 거 아니겠냐고. 큰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아버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세 형제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잘살게 된 게 모두 형 덕분이에요.” 동생들이 흐느끼며 말했다. 어디선가 본 장면인 것 같아 생각해보니 삼 년 전 큰아버지의 칠순 잔치 때와 똑같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모가 말했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그렇게 말하고 고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어쨌든 생일 축하해.”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가는 동안 입을 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건 당황해서가 아니라 고모가 한 말의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윤성희는 끝내 고모가 한 말의 뜻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는데, 내 짐작에 그것은 오래도록 죽지 않은 남자들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삶을, 그것으로 모자라 제 후손의 삶까지 제 멋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려 드는 행위에 대한 정당한 항의다. 그것을 (긴 잔치가 끝난) 남성 중심의 문학사에 대한 반박으로 읽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나의 이야기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들’의 서사에 편입되지 못했던 수많은 구성원들의 목소리다. 요약을 거부하기에 종종 생략될 수밖에 없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목소리들이다. 흔히 윤성희의 소설을 수식하는 ‘소소한’이라는 형용사는 그래서 부적절하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열 편의 단편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2016년을 사는 우리에게 각별하게 읽히는 소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요약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금정연ㆍ서평가

작가 약력

1973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레고로 만든 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레고로 만든 집’, ‘거기, 당신?’, ‘감기’, ‘웃는 동안’, 장편소설 ‘구경꾼들’이 있다. 현대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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