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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낸 창문 바람과 냇물 소리 들라하라

입력
2016.11.0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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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에 살창을 내고 시냇가에 고졸한 정자를 올린 독락당. 짙은 숲과 계곡에 숨을 열고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비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이성원기자
담벼락에 살창을 내고 시냇가에 고졸한 정자를 올린 독락당. 짙은 숲과 계곡에 숨을 열고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선비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이성원기자

천년 신라의 역사와 조선 유가의 법도를 품은 땅 경주를 거닐었다. 깊어진 가을, 안강과 보문의 너른 들녘은 온통 황금색이다. 경주의 풍경은 지난 지진의 충격을 딛고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땅이 흔들렸고 농단에 세상이 요동쳐도 가을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독락당과 옥산서원

안강들을 지나 옥산리 세심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마을 초입엔 멋진 소나무 세그루가 객을 맞는다. 누렇게 익은 논바닥 위에서 온몸으로 그 신산의 시간을 새기고 있는 노송 3형제다. 휘는 방향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차가 멈춘 곳은 독락당. 조선 중종 때 문신 회재 이언적이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던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다른 고택과 조금 다르다. 마당이 주변의 지형에 비해 낮아 고택 전체가 낮게 깔리는 인상을 준다.

독락당 담의 살창.
독락당 담의 살창.

독락당 옆으로 흐르는 물줄기 자계천이 아름답다. 그 계곡의 풍경보다 더 아름다운 건 사랑채 옆 담벼락에 뚫린 살창이다. 담에 창문을 열겠다는 그 놀라운 아이디어 때문이다. 내 비록 세상과 겹겹의 담을 쌓고 은거해 있지만 담벼락에 작은 창을 내 시내의 물소리를 들이고 숲의 바람을 맞겠다는 것. 그 살창 앞에 서자 갑갑했던 속이 확 뚫리는 듯했다.

시냇가 담벼락의 끄트머리엔 독락당의 별당인 계정(溪亭)이 있다. 자계천변 너럭바위에 한쪽 기둥을 딛고 선 운치 있는 정자다. 정갈한 계곡물과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정자를 감싸고 있다. 자계천에서 올려다 본 정자는 흙벽과 나무기둥의 속구조물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꾸미지 않은 고졸함에 더 자연에 녹아 드는 풍경이다.

이번엔 계정에 올라 홀로 자계천을 내려다 본다. 자연의 한 복판을 나는 양탄자 위에 올라탄 느낌이다. 회재가 은거했던 독락당의 ‘독(獨)’과 ‘락(樂)’을 한껏 느껴본다.

정혜사지13층석탑.
정혜사지13층석탑.

독락당에서 마을 위 300m 걸어 오르면 통일신라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혜사지13층석탑을 만난다. 동 시대 그 어느 탑과도 비슷하지 않은 매우 독특한 모양의 석탑이다.

옥산서원 세심대.
옥산서원 세심대.

독락당에서 내려오는 길 회재를 제향하는 서원인 옥산서원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강당ㆍ사당·누각·부속건물이 짜임새 있게 배치돼 있다. 서원 앞 거무스름한 너럭바위 사이로 독락당에서 이어진 자계천이 흘러내린다. 퇴계 이황은 이 너럭바위에 세심대란 글자를 세겼다. 세심대의 풍경은 특별했다. 물은 거셌고 벼루를 닮은 암반 사이로 굵은 물줄기가 떨어졌다. 그 작은 폭포 앞 개울을 건너는 외나무다리에 한참을 걸터앉았다. 서원 지붕 위로 물들어가는 가을에 거친 마음을 눅여본다.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양동마을.
양동마을의 향단.
양동마을의 향단.

독락당과 옥산서원과 멀지 않은 곳에 너른 안강들을 지켜보고 선 전통마을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이다. 이곳이 회재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설창산 자락에 안긴 마을의 생김새가 독특하다. 산자락이 말 물(勿)자 모양으로 갈라져 내려오는데 그 골 사이에 집들이 차곡차곡 들어섰다.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성씨가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다. 140여 채 되는 집들 중 월성 손씨 고택 서백당, 여강 이씨 종택 무첨당, 마을 입구 언덕에 있는 관가정, 회재가 머물던 향단 등은 꼭 둘러봐야 할 고택들이다.

삼릉 가는 길

보문의 숙소에서 눈을 뜨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초록을 씻어내는 가을비다. 무장산 억새를 보려던 계획을 접어야 했다. 차선으로 선택한 코스는 삼릉 가는 길. 신라 천년의 시간을 걷는 7.4㎞의 코스다.

복원중인 월정교.
복원중인 월정교.
경주 교촌한옥마을의 신라토기 체험공간 한국토기.
경주 교촌한옥마을의 신라토기 체험공간 한국토기.

시작점은 경주 최부자집이 있는 교촌한옥마을. 신라 신문왕때 설립된 국학이 있었고, 원효와 요석공주가 사랑을 나눈 요석궁이 있던 곳이다. 교촌한옥마을엔 다양한 전통문화체험장이 마련돼있다. 민낯의 신라토기를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토기공방(한국토기), 전통 손누비를 해볼 수 있는 누비체험장과 함께 유리공방, 다도예절교육장 등이 있다. 마을 옆엔 최근 월정교가 복원되며 더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이후 길은 천관사지, 오릉, 나정, 포석정, 배동 삼존불, 삼릉으로 이어진다.

천관사지는 김유신 장군과 천관녀의 로맨스를 품은 곳. 술 취한 유신을 애인 집으로 데려간 말을 단칼에 베어버렸던 현장이다.

오릉.
오릉.
나정.
나정.

봉분의 곡선이 물결치는 오릉을 지난 길은 신라의 시작을 알리는 나정으로 향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알을 깨고 나온 곳이다. 눈 앞의 나정은 그냥 빈터다. 주변을 감싼 노송이 신라 천년과 그 뒤의 또 다른 천년의 시간을 움켜쥐고 있는 공간이다.

포석정.
포석정.

신라의 시작점인 나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신라 종말의 아이콘인 포석정이 있다. 927년 신라 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군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이라 전해진다. 역사의 비애를 품은 포석정, 술잔을 띄웠던 아름다운 돌물길 위로 단풍이 곱게 내렸다.

아름다워 더욱 애잔한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신라의 종말을 이끌었던 진성여왕이 떠올랐다. 신라 최악의 왕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진성여왕에 대한 사서의 평가는 박하다. 숙부인 위홍과 정을 통하며 함께 나라를 다스렸고, 위홍이 죽자 미소년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으로 세월을 보내다 나라를 망국에 이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나마 진성여왕은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라며 조카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스스로 궁을 떠났다고 한다.

지마왕릉.
지마왕릉.
지마왕릉 옆 숲길.
지마왕릉 옆 숲길.
경주 배동 삼존불
경주 배동 삼존불
삼릉 솔숲
삼릉 솔숲

국정농단 막장 드라마가 펼쳐진 지금 신라 멸망의 역사를 곱씹으며 걷는 빗길, 마음이 무겁다. 지마왕릉을 지나 배동 삼존불 앞에 섰다.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미소를 품은 삼존불인데 보호각이 설치되며 미소를 잃었다. 바위에 새겨진 부처의 표정은 햇살이 그려 넣는 것인데 그 햇살을 받지 못하니 표정이 사라진 것이다.

길은 음산한 공동묘지를 스쳐 삼릉 솔숲에 이른다. 이리 휘고 저리 휜 소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공간이다. 몽환적인 솔숲의 아름다움에 시름의 부스러기 조금 떨어뜨려 본다.

경주=이성원 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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