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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입력
2016.11.0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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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효과이다. 10월 중순 트위터에서 성인 남성이 청소년 여성의 연애를 비판한 것이 시작이었다. 청소년일 때 성인 남성으로부터 성적 착취를 당했던 성인 여성들이 그것이 어떻게 젠더 권력과 연령 위계가 작동하는 성폭력인지 이야기했다. 말하기는 폭발적이었고 한 사용자의 제안으로 ‘오타쿠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가 만들어졌다. 최초의 사례와 뒤이은 경험담이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집단, 소위 ‘오타쿠’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어디에나 있지만 범주화는 특정 집단 내에 존재하는 문화와 감수성이 성폭력을 생산하고 방조하는 메커니즘을 살펴보는 데 효과적이다.

해시태그는 들불처럼 미술계, 문단, 음악계, 대학, 가족 내 성폭력 등으로 확산되었다. 권력의 문제인 만큼 각 분야의 특수성과 결합했을 때 성폭력은 보편적 이미지(그러니까 으슥한 밤길에 ‘낯선 남자’가 난데없이 저지르는)보다 훨씬 악랄하고 모호하고 교묘해진다. 밥줄, 미래, 평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대응할 수 없고 반복된다. ‘그래도 되는’ 피해자를 감별하기 때문에 ‘나’에게 지극히 좋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가해자일 수 있다. 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의 속성을 간과한 사람들이 헌팅 그라운드에 벽돌 한 장을 더하면 사건은 더욱 은폐된다. 가해자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제발 언급 좀 삼가자. 정 말하고 싶으면 항아리에 대고 혼자 외치기를 추천한다.

비슷한 사례에서 용기를 얻고, “사실은 나도….” 하고 말문이 트이는 것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익숙한 일이다. 다만 그 장은 친구들끼리 둘러앉은 수학여행의 밤처럼 사적이고 폐쇄적이었다. 그래야 했다. 이번에는 문제가 좀 다르다. 실명을 걸든 익명을 고수하든 공적인 말하기이다. 한 번 스친 적도 없는,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살 사람들의 경험이 맞닿으면서 그 속에서 만나고 서로 응원하고 연대하고 지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구호가 이번에도 유효했다.

말하기의 목적이나 양상은 제각각이었다. 모두 의미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 ‘피해자’는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다. 가련하고 ‘순결한’ 피해자로 뭉개버릴 수 없는 다양한 삶이 거기에 있다. 당연히 폭로를 통해 추구하는 것도 다르다. 설사 얻으려는 게 금전적 보상이라도 뭐 어떻단 말인가. 엠버 허드가 조니 뎁에게 받은 이혼 위자료를 모두 기부한 데서 알 수 있듯, 금전적 보상은 언제나 금기시되거나 도덕적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가해자의 인생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스스로 망쳤듯, 금전적 보상은 피해자의 부도덕을 입증하는 알리바이가 아니라 가해자의 잘못을 환산한 결과일 뿐이다. 피해에 비용이 든다면 가해자가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

성폭력이 발생한 시점부터 약자의 위치인 피해자들은 공론화 이후 더욱 불리해진다. 대부분의 성폭력, 데이트 폭력은 증거가 없다. 어떤 것이 증거로 ‘채택’되고 인정받는 데에도 권력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생존자는 말했다. “일본은 늘 증거가 없다고 한다. 내가 바로 증거이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인정을 받고자 투쟁하는 실화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가족’에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자꾸 증거를 가져오래요. 우리가 증거예요. 이 몸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있는 것도 없는 것이 된다. 안 보이니까 정말 없다고 생각하는, 안 보고 살아도 아무 문제 없는 순진한 폭력의 세계. 그 속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말하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피해자에만 머물기를 거부하고 폭력의 고리를 끊으려는 이들의 지난하고 고귀한 싸움을 한때의 분란으로 흘려보낼 수 없다.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지속적인 연대가 필요하다. 더 이상 한 명도 잃을 수 없기에.

이진송 ‘계간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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