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곤 국제부장 jkkim@hankookilbo.com
제정(帝政) 말기 러시아의 라스푸틴이 등장했고 무당, 샤머니즘 등의 단어가 동원됐다. 최씨를 ‘é·mi·nence grise ‘(비선실세)라는 생소한 단어로 표현하는 일부 언론에도 눈길이 갔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를 외신들이 어떻게 보도하는지 궁금해 들여다 본 외국 언론 사이트에서 발견한 내용들이다.
외신들이 전하는 한국 소식은 대체로 한국 언론보도를 인용하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평소 주목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서울에서 보낸 뉴스를 우리 언론들이 ‘외신’ 반응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기이한 ‘재활용’도 마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한국인들’ (CNN), ‘탄핵소추 가능성’(환구시보) 등 심각한 서울의 상황을 자못 진지한 분석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영국의 유력지로 알려진 가디언은 한국 대통령의 ‘라스푸틴 같은 친구’가 귀국한 날에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에 집중했다. 저스틴 맥커리 기자의 바이라인(by-line)이 달린 기사는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가 흉탄에 숨진 뒤 박 대통령과 가까워졌다. 그는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비탄에 빠진 박 대통령을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최태민이 여섯 번 결혼하고 유사종교인 영세교 교주라는 보도도 있다”며 비교적 상세한 맥락까지 포착하고 있다.
맥커리 기자의 기사가 유독 눈길을 끈 것은 최씨의 전 남편(정윤회)을 설명하는 대목 때문이었다. “최순실은 최태민 사후에 박 대통령과 더 가까워졌으며 최씨의 전 남편은 2012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의 최측근 노릇을 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정윤회는 2014년 세월호 사건 당일 박 대통령과 함께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문장은 의문의 세월호 7시간 문제를 제기한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의 주장을 떠올리며 쓴 게 분명해 보인다.
맥커리 기자는 그러면서 한국의 야당 또한 정치적 혼란을 원치 않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탄핵 내지 하야 정국’을 무난하게 헤쳐나갈 것이라는 전망까지 제시하고 있다. 워싱턴의 한반도 전문가인 빅터 차의 말을 빌려 박 대통령의 새누리당 탈당 가능성과 비서진 개편 및 개각 카드까지 거론하는 등 저 이국의 기자는 한국 정치지형 변화까지 헤아리고 있었다.
맥커리 기자의 분석이나 전망이 다 맞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복잡한 구조의 우리의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전망은 크게 빗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 기사는 일주일이 넘도록 분노와 좌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특히 세월호 7시간의 지적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나 실체가 무엇인지 눈 부릅뜨고 바라봐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충분해 보인다.
검찰 수사로 최씨의 국정농단 행태와 800억원에 이르는 미르ㆍK재단의 ‘재벌 삥뜯기’ 전모는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최씨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이나 뇌물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을 것도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최씨를 단죄한다고 국민적 분노와 좌절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박 대통령 스스로 의혹의 전모를 밝히지 않고 어떻게 국민적 불신을 잠재울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하야와 탄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광화문을 넘어 전국으로 번지는데도 언제까지 거국중립내각 논란만 즐기고 있을 것인가.
상황은 이미 엄중해졌다. 저잣거리에 난무한 ‘찌라시’의 내용들이 속속 사실로 확인되면서 국민은 “지라시가 아닌 진실을 알고 싶다”고 외치고 있다. 진실은 최씨의 국정농단에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7시간의 진실과 대면해야 할 역사적 시간이 멀지 않아 보인다. 외신들은 이번 사태를 진작부터 세월호 7시간의 진실과 연결시켜 주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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