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에 처음 올랐던 건 입도한 지 일년이 넘어서였다. 오름이 싫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적응의 시간과 내 앞으로 쏟아지는 호기심거리들 그리고 즐길 거리들에 어쩔 수 없이 마주할 기회가 밀렸던 것뿐이었다. 제주에 여행 온 지인 가족의 일정에 함께 다니다 우연히 오름 앞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다랑쉬 오름은 나의 첫 오름이 되었다. 당시 만 네 살이던 아들은 함께 올라가겠다고 앞장서더니 계단 조금 올라서는 힘들다고 떼를 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엔 내가 아이를 목마를 태우고 정상까지 올랐는데, 당시 아이는 또래에 비해 과체중의 무게였다. 그래서인지 첫 오름의 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오름의 사계절을 관통하는 공통의 매력을 꼽으라면 나는 능선이 보여주는 관능적인 곡선이라 말한다. 그 관능의 곡선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자면, 나지막한 감탄과 함께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나무하나 없이 유연한 곡선을 보여주는 오름의 능선은 몸을 달아오르게 한다. 그 위로 작은 점 같은 사람들이 유유히 움직이고, 능선 아래에서 소들이 안긴 듯 풀을 뜯는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면, 영화 ‘지슬’에서 오멸 감독이 두 주인공이 도망쳐 올라간 밤 오름 능선 아래로 왜 여인의 나신을 오버랩시켰는지 수긍하게 되고, 왜 제주의 신은 설문대 할망이라는 여성인지 납득하게 된다.
오랜만에 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가을 오후의 하늘은 높고 바람은 거셌다. 경사와 높이가 비교적 쉽지 않은 오름이지만, 오름 분화구에까지 숨을 고르며 올라가면 거대하고 아름다운 분화구 너머 오름들의 군락과 한라산이 눈에 들어오고, 분화구 가장자리를 걸어 반대편으로 가면 다시 분화구 너머 용눈이오름과 수산봉,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한 눈에 펼쳐진다. 늦가을 바람은 무척 거세어 여유를 가지기 힘들지만, 내 마음과 의지대로 천천히 능선 위와 분화구 언저리를 걷는 일은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기 좋은 시간이다.
다랑쉬 오름에서 내려와 맞은편 아끈다랑쉬 오름에 올랐다. 내리막의 가을에 아끈다랑쉬는 말 그대로 작은 능선과 분화구 안으로 억새가 한창이다. 태풍 차바 때문인지 풍성함은 예년에 비해 덜하지만, 바람에 거칠게 몸을 맡기는 억새군락의 물결은 여전히 넓고 포근한 아름다움이다. 둥글고 살포시 패인듯한 분화구 주변을 뒤덮은 억새군락 사이사이 사람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움직이며 풍경을 장식한다. 웨딩 사진을 촬영하는 커플들도, 바람은 거세지만 옷차림과 표정은 억새의 포근함을 닮아 있었다. 잠시 한 자리에 서서 시야에서 사람들이 잦아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다랑쉬 오름을 보았다. 저물어가는 햇볕을 뒤로하고 다랑쉬 오름은 조금 어둡지만 웅장하면서도 특유의 능선느낌을 그대로 발산하고 있었다. 옆으로는 멀리, 한라산 정상자락이 구름에 걸쳐있었고, 그늘진 오름들의 능선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나의 시선에서 아끈다랑쉬의 분화구와 다랑쉬오름의 모습은 일종의 제의 같았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오름의 여신 앞에 물결치는 억새 뒤덮은 포근하고 넓적한 제기하나 살포시 올린 뒤, 경건과 소망을 담아 기도하며 제를 올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날이 더 추워지면 억새도 바람과 싸늘한 공기에 더욱 퍼석하게 말라갈 것이다. 그것 그대로 억새밭은 노루를 포함해서 목숨 붙은 것들의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줄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그 안에 사는 것들의 포근함이 되어준다. 목숨은 사람에게도 붙어 있는 것이니 사람에게도 포근한 안식이 간절해지는 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필요와 간절함이 이루어지도록 바람 부는 아끈다랑쉬 억새 사이에서 다랑쉬를 바라보며 기도한다. 세월은 너무도 하 수상해져 저마다의 혼과 생각들이 비정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삶을 꾸린 제주 역시, 점점 포근함과 안식의 시공간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대로 포근한데, 숨이 붙은 인간은 그 안에서 포근함을 누리지 못한다. 저물어가는 가을 오후의 억새 가득한 오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가만히 생각을 내리고 정돈하였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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