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약관 관련 강제성 없는 ‘사용 요청’ 공문
개인이나 기업이 예금 가압류를 당하면 은행이 다른 대출의 만기까지 즉시 무효화할 수 있는 ‘기한이익 상실’ 조항과 관련해, 은행권 표준약관 개정이라는 강수를 뒀던 공정거래위원회가 한발 물러선 것으로 확인됐다. 은행들의 반발을 의식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31일 은행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공정위를 대신해 지난 28일 국내 15개 은행에 개정된 표준약관의 ‘사용 요청’ 공문을 보냈다. 앞서 공정위는 지난 19일 기한이익 상실 조항 등을 손 본 새 표준약관(본보 10월19일자 18면)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날 공문에 담긴 사용 요청은 표준약관 개정시 통상 사용되는 ‘사용 권장 요청’과 달리 강제성이 없다. 현행 약관법상 공정위가 사용 권장 요청을 할 경우, 은행이 표준약관을 따르지 않으려면 개별약관에 표준약관과 다른 부분을 눈에 띄게 표시해야 하고 위반시 금감원 제재가 따른다. 반면, 사용 요청의 경우 은행들은 현행 개별약관을 그대로 유지해도 불이익이 없다. 공정위 측은 “사용 요청도 많이 쓰인다”고 설명했지만, 금융당국 관계자는 “지금까지 은행 표준약관을 개정할 때는 주로 사용 권장 요청이 쓰였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은행들이 표준약관 개정에 대해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격렬히 반발하자 공정위가 입장을 다소 완화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개정 전 표준약관과 현행 은행 개별약관은 기한이익 상실과 관련해 기업ㆍ개인이 채권자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은행 예금에 가압류(자산 동결)가 걸릴 경우 은행이 해당 고객 대출계좌의 기한이익(만기)을 무효화하고 곧바로 대출원리금과 지연이자까지 갚게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은행들은 그간 이를 근거로 다른 채권자보다 먼저 대출 원리금을 회수했지만 공정위가 기한이익 상실 시점을 본압류 시점으로 늦추는 내용으로 표준약관을 고치자 “대부업체와 은행을 똑같이 취급한다”며 강력 반발해 왔다.
금융권 관계자는 “공정위의 입장 변경으로 약관이 실제 바뀐 줄 알고 은행 거래를 할 소비자들만 혼란을 겪게 됐다”고 꼬집었다.
이성택 기자 highno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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