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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간의 광기…사진으로 보는 과테말라 승마 축제

입력
2016.10.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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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이 달렸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매해 같은 날, 과테말라 토도스 산토스 쿠추마탄(Todos Santos Cuchumatan, 이하 토도스 산토스)에선 술에 찌든 유혈 경기가 벌어진다. 3일간 축제, 그 꿈 같던 현장 추적기.

과테말라 토도스 산토스는 첩첩산중 공중부양 도시다. 화산이 아닌 산 중 중미에서 가장 높은 해발 2,500m에 떠 있다. 근처 큰 도시인 우에우에테낭고(Huehuetenango)에서 봉고차를 타고 고소공포증엔 악몽인 산길을 달려야 한다. 고작 43km 거리이건만, 2~3시간여 걸린다.

그곳엔 마야 후예의 원주민이 산다. 주민의 90% 이상이 마야의 언어인 맘(mom)을 쓰며, 그들만의 전통 복장을 한다. 코흘리개 아이부터 90대 할아버지까지 가릴 것 없다. 그 풍경에 턱이 빠진다. 이 오지가 세상에 드러난(적어도 지도상에 표기된) 건 1945년, 작가 마우드 오크(Maud Oakes)가 이곳에 2년간 머무른 뒤 쓴 두 권의 책으로부터다.

매년 10월 31일~11월 2일, 이 고요한 마을에 ‘핵폭풍’이 분다.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인 11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함이다. 3일간 불야성, 내일이 없는 축제다. 도시명인 토도스 산토스는 모든 성인(all saints)이란 뜻을 품고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핼러윈 데이’인 10월 30일, 축제의 시동이 걸린다. 폭죽이 터지고 마림바가 울린다. 인근 산중에서 원정 온 이를 실은 봉고차의 경적은 코러스다. 정적인 마을이 가장 동적으로 변환되는 순간, 술은 성급하게 비워진다. 목 넘김 하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다. 그 중심에 께찰테카(Quezalteca)라는 과테말라 전통 독주와 맥주가 있다.

11월 1일 이른 아침, 모두가 한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말 경기(Skach Koyl)장이다. 얄궂은 나무 펜스를 경계로 200m의 모랫길이 펼쳐져 있다. 경주 같지만, 경주가 아니다. 승부의 기준은 ‘빠르기’가 아닌 ‘버티기’다. 회당 편도로 길의 시작과 끝을 달릴 뿐이다. 이때 변수인 술이 끼어들면서 인내 테스트의 정점을 찍는다. 쉼 없이 마시고 또 격하게 달린다. 이 경기는 알코올이 분해될 시간 따윈 두지 않는 만취 경주다. 그곳엔 하이라이트도, 괄호도, 부호도 없다.

말 경기의 근원은 마을의 ‘흑역사’로 추정된다. 스페인 정복자가 과테말라를 쓸어버린 1500년대 초반, 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정복자들이 악마처럼 이곳에 나타났다. 동시에 마을의 영웅도 탄생했다. 강심장을 지닌 한 주민이 정복자의 말을 훔쳐 잡히기 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이후 그 용기를 기리며 마시고 달린다. 그리하여 말 위의 마초들은 영화 ‘쇼생크 탈출’의 명장면(두 팔 벌리기)을 재연했던가. 자유, 이 경기의 초심이었다.

최고의 눈요기는 경기보단 참가자의 치장에 있다. 한 해 중 토도산테로스(Todosanteros, 토도스 산토스 사람들)가 가장 눈부신 날이다. 남자의 기본 전통 복장은 자수 칼라가 있는 줄무늬 셔츠와 줄무늬 팬츠, 그리고 파란 테를 두른 밀짚모자다(기혼자는 팬츠 위로 검은 망토를 두른다). 축제는 레이어드 룩의 풍년이다. 모자엔 먼지떨이 같은 깃털과 리본이 달리고, 셔츠 위로 화려한 스카프가 걸쳐진다. 질주할 때면 리듬을 타는 색이 세상을 물들였다.

구경꾼도 만만치 않다. 여성의 기본 전통 복장은 자수 튜닉(Huipil)과 짙은 청색 롱 스커트다. 이 날이면 아이든 할머니든 옷장에서 가장 화려한 자수 옷을 꺼내 맵시를 뽐낸다. 저마다의 경기 조망 자리를 꿰차 환하게 웃었다. 위험하게 느껴질 정도다.

말은 주인 손을 심하게 타는 동물이지만 승마자 대부분은 말 주인이 아니다. 인근 마을의 말 주인에게 빌려 탄다. 심지어 말을 생전 처음 타는 간 큰 사내도 있다. 술과 속도에 못 이겨 낙마하는 건 자명하다. 모래야 배불리 먹는다 쳐도, 다른 말에 짓밟히는 비상상황 앞에선 웃음이 쑥 들어간다.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오전 10시 40분경, 첫 부상자가 발생했다. 젊은 10대 승마자였다. 병원 없는 이곳에선 응급치료도 마야식이다. 어머니들은 물이나 케찰테카를 입에 머금은 뒤 부상자를 향해 시종일관 뱉어냈다.

광기인가, 호기인가.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기절 후 눈만 뜨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눈가가 찢어지고 피 멍이 든 정도라면 당연히 다시 나왔다. 오히려 본인의 건재함을 알리는 엄지손가락을 척 세웠다. 그리곤 맥주를 들이킨다. 토도산테로스 사이엔 이런 전설이 있다. 만일 이 경기에서 누군가 죽는다면, 다음 해 풍년이 들 거라는 희생설이다. 토도스 산토스에서는 감자나 브로콜리 등을 경작하고 커피도 대규모로 재배한다.

태풍의 눈. 오후가 될수록 격해지는 혼란과 유혈 사태 가운데서도 스스로 깊은 잠을 택한 이도 있다. 시장은 지난 2008년 이래 독주를 금지했으나 축제 때만큼은 예외다.

축제의 이튿날, 11월 2일은 망자의 날(Day of the Dead)이다. 어제처럼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공동묘지다. 24시간 영업인 듯한 바는 오전에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세상에 음주 금메달이 있다면 이들이 떼놓은 당상이다.

작은 십자가가 있는 좁은 문을 관통하면 또 한 번의 충격이다. 무덤이 세상의 모든 색을 입었다. 명을 다한 혈족도 있으나 대부분 집단학살에 사라진 영혼이다. 1982년경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Efrain Rios Montt) 대통령의 군사 독재에 의해 2,000여 명의 이곳 마야인이 희생됐다. 36년간 내전의 참사였다. 그때의 비극을 영롱한 마림바와 함께 달래고 있다.

망자를 향한 마야인의 애달픈 마음이 전통 복장에 드러난다는 설도 있다. 망자의 불멸을 기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붉은 팬츠는 조상의 뿌려진 피요, 파랗고 하얀 줄무늬 셔츠는 하늘의 영혼을 상징했다.

무덤 위에 앉거나 서거나. 대부분 바람에 시간을 흘려 보냈다. 망자를 위한 자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의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우연과 필연이 섞인 만남, 1년 중 단 한번의 축제가 내어준 선물이었다.

다음날 새벽녘, 우에우에테낭고행 봉고차에 올랐다. 새하얀 서리가 창문에 끼었다. 손으로 쓱쓱 지우니, 여전히 새하얀 수염을 단 산속이었다. 이것은 분명 꿈이었다.

강미승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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