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상실감 밀려왔다”
중학생 “배운 것과 다른 사회”
주부 “막장 드라마보다 더해”
전 세대 아우르는 자발적 참여
경찰도 “협조해준 시민들 감사”
정병철(58)씨는 자칭 애국보수주의자다. ‘베이비 붐’(1955~63년생) 시기에 태어나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킨 건 보수세력’이란 믿음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김영삼ㆍ이회창ㆍ이명박ㆍ박근혜 후보를 찍었다. 당연히 시위는 해 본적도 없다. 보수정권을 비판하는 젊은이들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 서있었다. 시국 현안을 놓고 사사건건 부딪쳤던 딸(25)과 함께 보수의 상징인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라고 소리쳤다. 정씨는 “세월호 참사 때도, 정윤회 파문 당시에도 대통령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라고 판단해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며 “하지만 일개 민간인에게 대통령이 휘둘리는 것을 보면서 이 나라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상실감이 밀려 왔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 규탄 집회는 세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분노의 목소리로 뒤덮였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코앞에 둔 10대 수험생부터, 실업의 늪에 빠진 20대, 가족 건사하기도 바쁜 30, 40대 직장인 및 주부, 박근혜 정부의 버팀목이 돼 왔던 5060 장년층까지 격앙된 민심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간 50, 60대 이상은 박 대통령의 절대적 우군이었다. 대선 득표율만 봐도 박 대통령은 60세 이상(72.3%)에서 20대(33.7%)의 두 배가 넘는 표를 얻었다. 그랬던 이들이 등을 돌렸다. 홍모(61)씨는 “보수란 한강의 기적처럼 나라 발전을 위해 희생하는 것인데 민간인의 조언으로 국정을 운영하는 박 대통령은 보수를 자처할 자격도 없다”고 개탄했다.
장년층의 민심 이반은 지표로 드러난다. 25~27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에 대한 60대 이상의 직무 긍정률과 부정률은 각각 36%, 52%로, 부정적 평가가 처음으로 긍정 평가를 앞질렀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대통령 스스로 국가운영의 기본시스템을 무너뜨린 탓에 민주주의 훼손을 감수하고도 힘들게 이룩한 경제성장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보수층이 절망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자발적 시민이 주체가 된 집회 양상은 이번 사태에 대한 공분의 파고가 예사롭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당초 이날 집회는 50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앞장섰다. 주최 측도 많아야 참여인원이 5,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광장으로 모여 든 탄핵 촛불은 어느새 1만개를 훌쩍 넘겼다. 중학생 박모(15)양은 “교육을 통해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배웠지만 우리가 목도한 정유라 특혜 의혹은 그런 교육과 거리가 멀었다”고 말했다. 다섯 살 딸을 품에 안고 난생 처음 거리 집회에 참여한 최모(41)씨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현실은 국가를 향한 최소한의 신뢰마저 져버리게 했다”고 날을 세웠다.
특정 단체가 주도하지 않아 평화롭게 진행된 집회 과정도 시민 참여에 동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난해 민중총궐기 대회 당시 백남기 농민을 죽음으로 몬 물대포와 횃불, 쇠파이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때 일부 시위대가 청와대로 향하려다 경찰과 대치하기도 했지만 물리적 충돌을 빚어 연행된 집회 참가자는 20대 청년 한 명에 불과했고, 곧 풀려났다. 서울경찰청이 30일 “경찰의 안내를 따르고 이성적으로 협조해 준 시민들에게 감사 드린다”는 입장을 내놓을 정도였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 울산 제주 전주 등 전국 곳곳에서 정권 퇴진을 바라는 준법 집회가 열렸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대회가 열릴 12일까지 매일 오후 7시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를 이어갈 예정이다.
불붙은 반정부 시국선언은 교육계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30일 성명서를 통해 “내달 4일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과 선언자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전교조 관계자는 “지금까지 노조 지도부가 시국선언을 먼저 제안한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일선 교사들의 요구가 굉장히 강하다”고 전했다. 대학가는 이미 지난 26일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전국 40여개 대학 총학생회가 시국선언을 내놓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성신여대 등 다른 대학도 속속 동참할 예정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보나 보수에 관계 없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 분노의 폭과 깊이가 엄청나다는 사실이 입증됐다”며 “국정농단 심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허경주 기자 fairyhkj@hankookilbo.com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