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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분노에 중독된 나라

입력
2016.10.30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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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이 분노에 중독된 것 같다. 우리는 말로만 듣던 ‘나라 잃은 기분’이 무엇인지 체감하고 있다.

처음은 온 나라가 갑자기 제기된 재단 비리로 소란스러웠을 때다. 늘 그렇듯이 국민은 사실과 엄단을 원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증거는 미약했고, 수사기관은 지지부진했고, 실세들은 끝까지 모른 척 잡아뗐다. 의혹은 당연히 부풀어져 나갔다. 여기서 하늘에서 떨어진 듯,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난다. 아마 수사기관에서 그 증거를 찾았으면 오간 데 없이 증발했을 것이지만, 언론으로 대표되는 국민의 손에 떨어진다.

이 순간이 나는 너무 분하다. 지금까지 의문을 제기하고 증거를 찾지 못한 자들은 누구건 그 지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번에도 이 순간이 없었으면 비선 실세는 여전히 나라를 지배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왜 국민은 이런 우연에 안도하며 사실을 알게 되어야 하는가. 왜 권력자들 사이에선 자정 능력이라고는 없고, 의혹은 이런 용기에 의해서만 밝혀져야 하는가.

여하튼, 과정으로 비추어 보면 대통령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싫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명약관화한 증거가 나왔다. 그러자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대응에서 한계를 느끼고 국민 앞에서 사과를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사실관계를 인정한 사과의 내용은 무엇인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대통령한테 직접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어가라고 뽑았다. 하지만, 국정과도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 나라를 주물렀다. 이는 나라 근간을 뒤흔드는 내용이다. 그러면 국민은 들어야 한다. 이 불법을 저지른 이유는 뭔가. 왜 하필 그 사람이며 당신과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었나. 어떤 도움을 어떻게 받고,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또 내가 당신에게 맡긴 국정은 어떻게 변했나.

안타깝게도 국민은 이런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2분도 안 되는 대본을 읽고 어딘가로 사라진다. 응당 내용에 있어야 할 문서의 유출 경위, 관련된 사람들, 그 사람들의 잘못과 자신의 책임, 그리고 향후 처벌과 대책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직접 들은 바가 없다. 범죄를 인정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로는 믿기지 않는다.

이 사과가 시대와 국민 정서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국민의 합일된 견해다. 여기서 이러한 말을 제어해줄 최소한의 장치조차 없어 보이는 것도 또한 큰 문제다. 대통령은 투명하게 정치하라고 국민이 믿고 맡긴 사람이다. 이 사람이 긴 국정 기간 연설문도 일반인에게 첨삭 받고, 그 외 중요한 정책이나 남북 관계까지 일반인에게 직접 보고해 조언을 받고 행동했다. 이걸 견제할 시스템도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잘못이 밝혀지자 나서서 수습하거나 직언할 사람도 없었다. 되려 청와대와 정부 측은 부인하거나 나서서 감싸고, 심지어 대통령이 사실관계를 인정한 수사 대상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발뺌하고 있다.

이게 민주적이고 법치주의 나라인지 의문이 든다. 어떤 국민도 이런 체제를 원한 바는 없을 것이지만, 현실은 밀실 정치도 용인되고, 독재에 가까운 국정도 용인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능력 본위가 아닌 권력과 ‘인연’ 있는 주변 사람들이 실세를 떨치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헬조선’과 ‘흙수저’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자괴감이나 상실감, 온 국민이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해결책이나 어떠한 주장으로 끝날 수가 없다. 지금도 압수수색에선 빈 박스만 들고나오고, 관련자들은 명백한 증거를 제외하곤 전부 부인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권력자들은 한정된 증거로 책임을 돌리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것이 보인다. 이 흐름이 이 시국에서도 생생하게 읽히기에, 우리가 모두 분노에 중독되고 있다는 일갈만으로, 이 글을 닫을 수밖에 없다.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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