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축소판 버지니아에 가보니
클린턴 지지율 47%ㆍ트럼프 38%
사전투표소 북적 클린턴에 유리
소수인종 “투표로 트럼프 혼낼 것”
농촌은 여전히 트럼프 지지 일색

미국 수도 워싱턴 DC를 메릴랜드 주와 함께 포위하고 있는 버지니아 주는 인구 수로 미국 전체 50개 주에서 12위에 불과하다. 그런 버지니아가 2008년 이후 미국 대선의 판세를 크게 조망할 수 있는 주요 지역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수도 워싱턴 주변인 북부 버지니아의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이민 인구가 급증하면서, 백인ㆍ흑인ㆍ아시안 등 인종 구성은 물론이고 도시ㆍ농촌지역 혼합 비율 등 버지니아의 유권자 분포가 미국 전체 구성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830만명에 육박하는 버지니아 전체 인구 가운데 70% 가량이 백인인데 이는 미국 사회의 전체 백인 비율과 유사하다. 흑인과 아시안 비율은 각각 12%와 5%로 미국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북부 버지니아와 주도(州都)인 리치먼드 주변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 인구밀도가 낮은 농촌 지역인 것도 서부ㆍ동부 해안지역에만 대도시가 밀집한 미국 전체와 유사하다.
이에 따라 2016년 대선에서 버지니아 주의 민주ㆍ공화당의 공방 구도는 정확히 미 대륙 전체 판도의 축소판이다. 전체 판세는 힐러리 클린턴(지지율 47.7%) 민주당 후보가 도널드 트럼프(38%) 후보를 비교적 여유 있게 앞서지만, 농촌 지역과 저학력ㆍ백인 남성에서는 트럼프가 압도하는 상황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공화당의 텃밭이 미 대륙 중부에 집중된 것처럼 버지니아 주에서도 백인 인구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농촌 지역에서는 클린턴이 발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일 버지니아 주 북동부 농촌 도시 해리슨버그에서 열린 마이크 펜스 공화당 부통령 후보 유세는 ‘도시는 민주ㆍ농촌은 공화’로 나뉜 미국 민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날 낮에 열린 유세에는 해리슨버그 뿐만 아니라 루레이, 프론트로열 등 340번 도로 주변의 소도시에서 1,000여명의 공화당 지지자들이 몰려와 ‘트럼프와 펜스를 지지한다’고 외쳤다. 20대 여성 제시카 묵은 “보수적 신념을 지키는 트럼프와 펜스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유세 직후 펜스 후보에게 다가가 가져온 성경에 사인을 받기도 했다. 한 60대 남성은 “워싱턴 정치인들의 협잡 때문에 미국 시민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며 “워싱턴을 청소할 인물은 트럼프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지지열기를 반영하듯 이 일대 농촌도시 거리에는 ‘트럼프ㆍ펜스 지지’ 푯말이 ‘클린턴 지지’보다 3, 4배 가량 많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컸다. 그러나 340번 도로를 빠져 나와 미 연방 수도 워싱턴DC로 연결되는 66번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분위기는 급변한다. 불과 50㎞만 동쪽으로 이동해도 민주당 지지자들이 훨씬 많아진다.
워싱턴DC에 직장을 둔 연방정부 공무원이나 변호사 등 고학력자 비율이 높고 소수인종 비율이 47%에 달하는 페어팩스 카운티와 라우돈 카운티에서 트럼프 인기는 바닥이다. 이 지역에서 연방하원 의원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의 바바라 콤스탁 의원이 트럼프와 거리를 두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5일 찾은 페어팩스 카운티 산하 애넌데일의 메이슨 주민센터 부재자 투표소 풍경은 민주당의 압승을 예고하고 있었다. 버지니아 주법에 따라 투표소에서 50m 가량 떨어진 곳에 민주ㆍ공화당 선거안내 부스가 설치됐는데, 유권자들의 관심도 차이가 극명했다. 공화당 부스에는 찾는 이가 거의 없지만, 민주당 부스에는 유권자들이 몰려 복잡한 투표 용지 작성 요령을 묻는 모습이 연출됐다. 11월8일 선거에는 대통령뿐만 아니라 연방 하원의원과 페어팩스 지방정부가 제안한 ‘음식세’ 찬반 투표도 이뤄지는데, 대통령 후보는 당연히 클린턴을 찍지만 다른 항목에는 어떻게 투표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이 많았다.

민주당 도나 버르디에 선거운동원은 “여성을 비하하고 소수인종을 깔보는 트럼프를 응징하기 위해 많은 깨어있는 시민들이 투표소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버르디에 운동원의 안내를 받은 한 흑인 여성 유권자는 “이 표로 트럼프를 혼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사전 투표비율도 클린턴에게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제인 탄넨바움 투표소 관리인은 “페어팩스 등록유권자 75만명 중 최소 10만명 가량이 사전 투표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워싱턴포스트도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페어팩스에서 15만명 가량이 사전 투표를 할 것으로 보인다”며 “버지니아 주에 배정된 13명의 대통령 선거인단이 클린턴 진영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음담패설 파문 이후 트럼프에 염증을 느낀 고학력 여성을 중심으로 공화당 진영 내부에서의 균열도 감지되고 있다. 남성 공화당원과 여성이라도 고령층은 트럼프 지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메이슨 투표소에 만난 바바라 넬슨(70ㆍ여) 트럼프 선거운동원은 “트럼프에게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여성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며 “민주당의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공립학교 교장이자 열렬한 공화당원인 채드 매크레씨도 “클린턴은 거짓말만 늘어 놓지만, 트럼프는 이민과 세금 등에서 제대로 된 정책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반면 그의 아내인 메히건 매크레 변호사는 “한 여성으로서 트럼프의 행동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남편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루레이ㆍ페어팩스(버지니아)= 조철환특파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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