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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월드] 위키리크스 10년… 반미ㆍ친러로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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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월드] 위키리크스 10년… 반미ㆍ친러로 변해

입력
2016.10.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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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이메일 폭로에 열 올리지만

되레 美 ‘표현의 자유’ 역설적 증명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4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 영상을 통해 출연해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4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1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 영상을 통해 출연해 연설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세계 각국 정부의 미공개 정보를 유출, 인터넷에 공개하는 비영리기관 ‘위키리크스’가 개설 10주년을 맞았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가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을 사살하는 장면을 촬영한 ‘부수적 살인’을 2010년 공개하면서 ‘정의로운 전쟁’의 위선을 까발린 위키리크스. 그러나 이제 그는 현재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와 한 편에 서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곤란하게 하는 이메일 유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불과 6년 전 미국의 신보수주의와 군사주의 노선의 치부를 드러내 ‘자유의 전사’로 여러 언론상까지 수상한 위키리크스 대표 줄리언 어산지는 이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승리의 표시’를 내려줄 ‘구세주’로 떠올랐다.

자유의 전사에서 트럼프 지지자로?

물론 위키리크스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4일 10주년 기자회견을 앞두고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프레스킷에는 “위키리크스는 특정 정파를 지지하지도 않고 특정 정파의 후원을 받지도 않는다”고 돼 있다. 또 어산지는 클린턴과 트럼프의 대결을 “콜레라와 임질 중에 선택하라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발언은 미국 최대 커뮤니티 ‘레딧’에 모여 있는, ‘역사상 가장 더러운 대선’에 질린 네티즌 일반의 태도를 연상케 한다. 어산지와 위키리크스는 여전히 구세대 정치와 대규모 자본을 혐오하는 ‘인터넷 자유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최근 위키리크스의 폭로와 어산지의 활동을 보면 그가 미국 대선에서 어느 쪽을 지지하는지는 명백하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의 분석에 따르면 위키리크스의 폭로는 대부분 트럼프를 지지할 의도를 품고 있다. 위키리크스는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기 직전 민주당 전국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클린턴을 편파적으로 지지했다는 내용이 드러난 메일을 공개했고, 그의 말에 의하면 클린턴에게 ‘치명상을 날릴 만한’ 이메일은 일부러 대선이 임박한 시기에 발표하겠다며 ‘10월 서프라이즈’를 약속했다. 하지만 어산지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바로 그 10월 트럼프의 ‘음담패설 테이프’가 미국 워싱턴포스트(WP)를 통해 공개된 것이다.

트럼프-어산지-푸틴 연결고리

영국 일간 가디언은 위키리크스가 클린턴을 집중적으로 노리는 이유를 두 가지로 나눠 본다. 하나는 위키리크스가 현재 손에 넣은 비밀문건이 정말로 클린턴과 민주당 문건밖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키리크스 편집자인 새러 해리슨은 블룸버그통신에 “만약 트럼프의 정치적 신뢰성을 훼손하는 기밀문건이 들어온다면 당연히 공개할 것”이라며 “의도적인 편집을 가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위키리크스에는 이미 공개된 내용을 다시 증명하는 문건을 구태여 재공개하지 않는다는 불문율도 있다. 트럼프의 소득신고서와 세금환급신청서를 우편함에서 꺼내 진본임을 증명한 NYT, 음담패설 테이프를 공개한 WP 등 트럼프의 치부를 드러낸 언론 보도는 상대적으로 많이 나와 있다.

또 하나는 어산지가 정말로 반(反)클린턴 인사일 가능성이다. 사실 위키리크스가 2010년 국무부 외교문건을 유출했을 당시 클린턴은 국무장관이었다. 당연히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어산지를 “스스로를 위대한 전사로 포장하면서 무신경한 폭로로 평범한 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국가 안보를 훼손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위키리크스는 10주년 행사에서 클린턴이 장관 시절 어산지를 가리켜 “이 사람을 그냥 드론으로 제압하면 안 되느냐”고 발한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클린턴은 트럼프와의 대결구도에서 ‘워싱턴 정가’를 상징하기에, 현재 어산지와 그를 지지하는 인터넷 자유주의자들의 주적이다. 미국 워싱턴 소재 연구소 대서양위원회의 알리나 폴랴코바 유라시아센터 부소장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줄리언 어산지는 미국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이 현 세계질서의 핵심문제라고 보는 것이고, 이를 위해 인권과 투명성을 주장하는 바로 그 국가(미국)가 사실은 인권을 침해하고 비밀주의에 의존하는 위선적인 국가임을 폭로하고 싶어한다”고 분석했다.

어산지의 입장은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미국 헤게모니를 흔들고 싶어 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 클린턴의 상대인 트럼프는 대선 기간 내내 푸틴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발언을 했으며 시리아 내전 해결을 위해 러시아와 협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서부를 둘러싼 중동과 유럽에서 ‘미국 헤게모니’의 포기를 선언한 셈이다.

이 때문에 서구 언론과 학계는 대부분 푸틴 대통령과 어산지, 그리고 트럼프 사이에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미첼 오렌스타인 펜실베이니아대 러시아동유럽학 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에 “러시아의 ‘10월 서프라이즈’는 실패로 돌아갔다”며 음담패설 테이프 파동으로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수세에 몰리자 러시아가 미국과의 시리아 종전 협상과 플루토늄 폐기 협약을 모두 중단해 버린 것이 러시아가 위키리크스에 정보를 제공한 정황 증거라고 지적했다.

“위키리크스는 건강한 민주주의의 증거”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10월 서프라이즈’는 어산지와 트럼프 지지자들의 기대와 달리 결정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트럼프가 빠진 수렁이 그만큼 강력하기도 하지만, 클린턴이 민주당 경선 경쟁자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영향을 받기 전 월가와 가까운 평소 성향을 드러내 보이는 수준에 그치고 있기 때문에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평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나는 ‘위키힐러리’를 지지한다”고 썼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골드먼삭스 연설 속 클린턴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음이 드러나기에 오히려 더 클린턴을 지지하게 됐다는 투다.

NYT 칼럼니스트 짐 루텐버그는 위키리크스의 이메일 유출이 역설적으로 미국이 표현의 자유를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준다며 “위키리크스(와 러시아)의 폭로는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루텐버그에 따르면 NYT나 WP 등 주요매체가 사실상 클린턴의 편에 섰지만 어쨌든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메일 내용을 분석해서 보도하고 있다. 또 클린턴과 선거본부장 존 포데스타는 메일 속에서 사적인 고민을 나누면서 과격한 발언을 하기도 하지만, 치열하게 토론하고 숙고해 정치적 대안을 마련한다. 루텐버그는 “진정한 투명성을 원한다면 푸틴 대통령도 자신의 이메일을 공개해야 한다”며 클린턴의 메일함에서 보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이 푸틴과 같은 독재 정권 대통령의 메일함에도 들어있을지는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어쩌면 위키리크스 폭로의 수혜자는 트럼프가 아니라 클린턴의 당선 후 그의 행정부를 감시하겠다고 예고한 샌더스 의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샌더스 의원은 ‘10월 서프라이즈’에 대한 반응을 묻는 WP 기자에게 “그런 전략회의는 어느 대선 캠프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웃어넘겼다. 미국 인터넷언론 복스는 이것이 ‘10월 서프라이즈’가 힘을 얻지 못한 이유라고 지적했다. 어산지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요소는, 유권자가 공개된 이메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다는 것이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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