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0일 ‘워킹 맘’ 서디너 워커(Sirdeaner Lynn Walker)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났다. 그날 백악관 이스트홀에서는 청소년 집단 따돌림(Bullying)의 현황과 대책을 두고 전문가와 교육부 법무부 등 관련 부처 관계자들이 모여 풀 타임 회의를 가졌고, 워커는 집단 따돌림으로 자녀를 잃은 학부모 중 한 명으로 초청된 거였다. 오바마가 워커를 따로 만난 것은 그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미국 사회에 알리며 연방과 주 정부의 법 제정 등 대책 마련을 촉구해 온 이였기 때문이었다.
워커는 오바마에게 2년 전 잃은 11살 아들 칼(Carl Joseph Walker-Hoover)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선거 날 밤 나는 아들에게 어떻게 미국이 여기까지 왔는지 이야기했어요. 칼이 잘 시간이 지났지만 그 날은 봐줬고, 당신의 당선이 확정되는 걸 보며 칼은 무척 행복해 했어요.” 그는 새 대통령도 편모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그를 롤모델로 삼으라고, “칼, 너도 원하는 게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앞에서 미국 대통령인들 할 말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오바마가 한 말 가운데 알려진 건 “아이가 참 잘 생겼네요”가 다였다. 사실 그 날의 컨퍼런스 자체가 대통령의 대답이었다. 그는 회의에 참석해 자신도 어릴 적 전학을 다니면서 큰 귀와 이상한 이름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곤 했다고 말했다. 워커는 “대통령의 그 말이 무척 뭉클했다.(…) 집단 따돌림의 경험이 있다는 건 따돌림 당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대통령이 안다는 거였다”고 말했다.(masslive.com, 2011.3.12)
2009년 4월 6일 저녁,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뉴 리더십 차터스쿨(NLCS) 6학년(중1)이던 11살 칼은 노스햄프턴 집 이층 난간에 전기 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 퇴근한 엄마 워커에게 칼은 그날 학교에서 책가방이 교실 TV 모니터를 건드려 넘어지는 바람에 한 급우가 다쳤는데 그가 자기를 죽여버리겠다며 위협했다고, 5일 정학까지 맞게 됐다며 낙담했다고 한다. 칼은 엄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제 방에 올라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썼다. 그는 엄마에게 용서를 구하며 가족 모두를 사랑한다고, 자신의 포켓몬 카드를 남동생에게 전해달라고 적었다.(essence.com, 2009)
칼이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 건 2008년 9월 인근 초등학교에서 NLCS로 갓 진학한 직후였다. “게이 같다”는 게 따돌림의 이유였다. 워커는 즉각 학교에 그 사실을 알리며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호소했다. “거의 매주 한 차례씩 전화를 걸었어요.” 그는 일하는 엄마였지만 사친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해 교장을 만나고 생활지도교사를 만났다. 하지만 워커가 보기에 달라지는 건 없었고, 그건 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니 전보다 더 심한 보복성 괴롭힘에 시달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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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디너 워커는 스프링필드 토박이로 1965인 4월 23일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인종 차별이 심하던 딥사우스 출신이었고, 둘 모두 차별과 가난 때문에 대학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부모는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며 워커를 길렀다고 한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내 부모님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뿐 아니라 만나는 모두에게 공부를 하라고 적극 권유하곤 했다.”(masslive.com, 09.4.8) 워커는 보스턴 칼리지를 거쳐 서포크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미 국방부가 부상 제대 병사나 전사자 가족 등의 주택마련 지원사업으로 벌인 ‘주택 지원프로그램(HAP)’에서 일했다. 5남매를 낳은 워커는 막내딸을 임신했던 2004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직장을 그만뒀다. 다행히 병이 나아 다시 시작한 일이 매사추세츠 주 직장인재교육협회(Career Development Institute)의 노숙자 지원프로그램이었다. 노숙자 개개인을 상대하며 각자 집을 갖고 정착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주선하고, 자립 기반이 마련되면 직업학교든 고교나 대학이든 각자 수준과 상황에 맞는 학교 진학을 돕는 일이었다. “교육을 받는 것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을 향상하는 가장 좋은 길이죠.(…) 또 그것이 그들뿐 아니라 자녀들을 일어설 수 있게 하고, 바른 길을 가도록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워커는 노숙자들에게 결코 타인이 그들의 존재와 삶을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그는 지역 언론과의 ‘여성의 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장엔 저마다 장벽을 마주하고 있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때로는 어떤 낙인이 우리를 규정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다 양보하더라도, 누구나 자기의 자녀들은 자기보다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죠.” 그가 집단 따돌림을 겪는 어린 칼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그는, 일에 쏟던 저 순박한 열정으로, 칼과 자신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을 사회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워커가 맨 먼저 한 일은 칼의 심장 판막과 안구 기증이었다. 2009년 ‘Essence.com’인터뷰에서 그는 “지난 해 7월 야외 파티를 하던 날 칼이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다쳤어요. 왜 헬멧을 안 썼냐고 혼을 냈더니 제 친척이 ‘칼이 자기 헬멧을 사촌 동생에게 씌워주더라’고 하더군요. 칼은 그런 아이였어요. 장기 기증은 그리 어려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했다.(masslive, 위 기사)
그는 지역 학부모들과 연대해 스프링필드의 공립학교들이 집단 따돌림 근절 대책을 마련하도록 촉구했고, 시와 매사추세츠 주 정부와 의회, 미 연방정부와 상하원 의원들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사연과 학교 폭력의 실태를 전했다. 물론 그 전에도 후에도 학교폭력은 있었고, 희생자도 있었다. 워커가 만난 이들 중에는 피해자 부모도 가해자 부모도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따돌림을 가벼운 통과의례쯤으로 여기는 태도, 고쳐지지 않을 문제라는 식의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2009년 7월 안전한 학교법(Safe School Act)을 심의하던 연방 의회 청소년교육 관련 소위원회에 출석,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 언론들도 그 무렵 집단 따돌림의 심각성을 집중 보도했다. 2009년 미국 청소년 폭력예방센터(NYVPC)는 청소년 3명 중 1명이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거나 가해자, 혹은 둘 다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6~10학년생 약 13%가 집단 따돌림 가해 경험이 있고, 11%가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위축되고, 자존감 하락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맞설 능력을 상실하며, 극도의 고립감과 소외감 끝에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이야기. 그 영향은 청소년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성년기로도 이어져 우울증 등을 야기하며, 6~9학년 집단 따돌림 가해 경험자의 약 60%가 24살 무렵 최소 한 건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통계도 있다. 집단 따돌림에는 당연히, 육체적 가해 외에도 외면 배척 모욕 욕설과 문자나 이메일 SNS의 사이버 집단 따돌림도 포함된다. 워커는 오프라 윈프리 인터뷰 등을 통해 저런 통계와 학교 현장에서 자신이 경험한 바 등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처음부터 괴롭히는 아이(bully)로 태어나는 이는 없습니다. 그건 학습된 행위입니다.”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집단 따돌림 방지법(Anti Bullying Law)을 제정한 건 이듬해인 2010년이었다.
앞서 2009년 연방 의회는 1965년의 초중등교육법을 개정 “인종과 피부색, 종교, 국적, 장애, 성과 성지향, 젠더 아이덴티티에 근거한 집단 따돌림을 예방하는 학교 및 지역 활동에 연방 예산을 지원”한다는 조항을 포함시킨 ‘안전한 학교법’을 제정했다. 주 별로는 조지아주가 1999년 관련법을 최초로 입법화했고, 2015년 몬태나주를 마지막으로 모든 주가 관련 법을 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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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오바마의 대통령 임기가 시작된 해였다. 그의 교육정책은 여러모로 시련을 겪었다. 취임 직후 그는 ‘한국 공교육의 우수성’을 소개하며 교육정책의 모토로 ‘최고를 향한 경쟁(Race to the Top)’을 내세웠다. 모든 공립 학교가 언어, 수리 영역 평가시험을 치러 점수에 따라 교사를 평가하고 급료에 차등을 주는 정책이었다. 그의 정책은, 적어도 전통적 민주당 지지기반이던 미국 전교조(NEA)와 교사연합(AFT)이 보기에는 부시 정부의 ‘어떤 아이도 낙오시키지 않는다(No Child Left Behind)’는 교육 이념보다 퇴행한 거였다. 교육분야에 관한 한 그는 진보 진영의 지지를 잃었다. 오바마와 그의 친구인 아니 던컨 (Arne Duncan) 교육부장관 체제의 미국 공교육이 학교 폭력과 칼의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일 테지만, 전혀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진보 교육단체 등의 끈질긴 사퇴 요구 끝에 던컨이 물러난 것은 2015년 10월이었다.
워커의 결혼생활은, 칼의 아버지(Benjamin Carl Hoover Jr)가 매릴랜드에 산다고만 보도됐을 뿐 거의 알려진 게 없다. 둘은 이혼했거나 별거 중이었던 듯하다. 워커는 다섯 남매를 혼자 키웠고, 가족은 가난했다. 워커가 강연 등을 위해 미국 각지를 떠돌며 집단 따돌림 근절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그의 이웃들이 그를 도왔다. 2009년 “Be A Buddy Not a Bully”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단 ‘칼 워커 후버 재단’이 설립된 것도 스프링필드 주민들의 후원 덕이었다. 재단은 매년 대학 진학 예정자 가운데 학교 폭력 예방ㆍ근절을 위해 힘쓴 이들을 선발, 1인당 1,000~1,500달러씩 약 7만3,000여 달러의 장학금을 수여해왔다.(raycom-news network)
미국 방송 ABC는 신청자의 집을 무료로 개ㆍ보수해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Extreme Makeover- Home Edition’에 워커 일가의 집을 선정, 스프링필드 시와 주민 자원봉사자들의 힘을 보태 2011년 새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다른 가난한 이들을 제쳐두고 워커의 집을 선정한 것은 프로그램 공정성에 흠을 남기는 일이었지만, 노숙자들의 집 마련을 도우면서 정작 자신은 어린 아이들과 다 낡은 집에 사는 워커의 공적 헌신,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해 애써온 그의 노고를 보답하려는 그 선택에 불만을 제기한 이는 없었다. 새 집을 얻어 기뻐하는 워커 일가의 사연은 2011년 11월 방영됐다. 집이 지어지는 동안 워커 가족은 역시 방송사의 배려로 캘리포니아 헐리우드로 휴가를 떠났고, 그 이야기도 ‘Ellen DeGeneres Show’로 방영됐다. 매사추세츠대는 워커의 자녀들에게 4년 학비와 기숙사비 등 일체를 장학금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유선방송사 컴캐스트는 1년간 케이블방송과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워커는 성지향 이슈와 관련된 교육 단체 ‘GLSEN(Gay Lesbian Straight Education Network)의 이사회 맴버이기도 했다. 그는 국제 성소수자 청소년 교육 지원 단체인 ‘안전한 학교 연대(Safe Schools Coalition)’와 함께 활동했다. 2009년 인터뷰에서 워커는 칼이 성지향 때문에 고민했느냐는 질문에 전혀 그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겨우 11살이었어요. 사춘기도, 변성기도 겪지 않았어요. 집단 따돌림은 게이 이슈보다 훨씬 근본적인 겁니다. 칼의 친구 중 한 명은 뚱보라고 따돌림을 당했죠. 그 아이들은 어떤 이유로든 괴롭힙니다.”(essence, 위 기사)
2011년 4월 허핑턴포스터 기고문에서 워커는 “집단 따돌림은 동성애자 이슈도 이성애자 이슈도 아닙니다. 그것은 안전(safety) 이슈이며 인간에 대한 존중(respect)의 이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아이들이, 그들이 누구든, 다 잘 크고 성장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에 관련된 이슈입니다”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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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출신의 백악관 공공부문 수석보좌관 발레리 제릿(Valerie Jarrett)은 컨퍼런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자리의 목적은 백악관이 앞장섬으로써 집단 따돌림 이슈를 가볍게 여기거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것이고, 문제를 풀어나갈 전략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와 학생 등 당사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뭔지 알았습니다. 이제 해법을 찾을 때입니다.”(WP, 11.3.10)
그것이 국가가 있어야 할 이유 중 하나다. 시민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경찰력으로 진압부터 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자원과 인력을 투입해 해법을 찾는 일. 그것이 통치와 함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국가나 사회의 책임으로 억울한 희생을 겪은 유족을 불순분자로 몰아 내치는 게 아니라 우선 그 사연을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는, 공적인 문제를 앞장서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이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들을 돕고 응원하려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공동체의 일원이란 말은 그래서 인간과 동의어다. 워커의 삶이, 그의 이웃들과 미국의 정치가 그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워커는 재발한 암과 투병하다 10월 4일 별세했다. 향년 51세.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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